인도 여행: 생의 냄새와 그 기억
암릿사르에서의 첫날밤이 지났다.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해 보았지만, 지난밤의 피로는 잘 가시지 않았다.
내가 잠을 청하던 호텔방의 옆방에서 결혼파티를 벌이던 흥부자 인도인들은 자정을 훨씬 넘겨서까지 요란한 볼리우드 음악과 함께 신혼부부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다가,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호텔의 스탭을 불러 저들을 조용히 시켜야 할까 하다가,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여행을 오기 전 수년 간 인도에 수 십 번이나 들락날락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델리나 뭄바이, 첸나이와 같은 인도의 대도시의 안락한 글로벌 호텔 체인에서 편안히 호사를 누리던 출장자의 신분이었을 뿐이었다. '인도를 나만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라는 자만감은 내가 담당하던 작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나 겨우 통하는 것이라고, 간밤의 난리통이 단박에 증명해 준 것이다.
하지만 이 민낯의 여행이 주는 긴장감은 나쁘지 않다. 인도인들의 몰염치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탐험의 세계로 나아가는 두근거림은 몇 년 전 내가 처음 인도에 출장을 오던 날의 그 설렘과 닮아있었기에.
지방 도시의 작은 호텔에서 내놓은 아침식사는 식빵 몇 쪽과 인도식 쌀죽, 그리고 기름에 절은 치킨 소시지 몇 개뿐. 출장 때 묵었던 화려한 5성급 호텔의 그것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단출하였다. 하지만 이 평범함은 13억 인구의 광대한 대륙에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구분 지어 주지 않았기에 도리어 고마운 점도 있었다.
동네의 허름한 식료품점에서 가져왔을 것이 분명한 푸석한 식빵에 인도산 'Amul' 버터를 듬뿍 발라 입에 넣어 우물거리며, 나는 내가 위치한 자리를 조금씩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 이제 인도를 먼발치에서 관찰해야 하는 출장자가 아니라, 그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야 할 여행자라는 사실을.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들르기로 한 곳은 영국 식민지 시절, 자치권을 요구했던 시민 시위대에 대한 20여 분간의 학살이 자행된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 3.1 운동이나 제암리 사건 등,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우리로써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소일 것이다.
인도 사람들과 몇 번 얘기를 해 보았지만, 200여 년이나 지속된 영국의 지배와 수탈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본인에게 갖는 그런 감정을 인도인들이 영국에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도리어 가장 먼저 영국 식민지가 되었던 꼴카타와 같은 곳은 가장 먼저 영국 문화를 향유한 것에 대한 자긍심 비슷한 것까지도 갖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픔이 서린 현장에 직접 가본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의 골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판놀이하듯 유적지를 꼭짓점 삼아 연결하고 다니는 것은 그렇게 달가운 여행 방식은 아니지만, 인도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라 생각하며 나는 호텔을 나섰다.
정오를 갓 넘긴 시간, 인도 대륙을 달구는 태양은 델리에서도, 암릿사르에서도 공평했다. 암릿사르가 델리보다 북쪽에 있다는 사실은 더위를 피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번잡스러운 암릿사르의 거리 위에서 이글대는 인도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호텔을 좀 더 일찍 나서지 않은 것을 많이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을 탓해봐야 어쩌겠는가. 빨리 발을 놀려 잘리안왈라 바그를 찾아가는 수밖에.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곳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어디에도 잘리안왈라 바그는 보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에 꽤 훌륭하게 꾸며놓은 입구를 상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엔 북적대는 인도인들과 빵빵거리는 릭샤들 뿐.
당황하여 지나가는 인도인을 붙잡고 '잘리안왈라 바그가 어디냐'라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무신경한 표정으로 대답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한 구석을 가리킨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신경 써서 살펴보지 않으면 놓칠 만큼, 번잡한 길가에 파묻혀 있는 작은 하얀 철문이 있었다. 바로 잘리안왈라 바그의 입구.
역사적 장소에 대한 인도의 푸대접에 놀라워하며 나는 좁은 철문 앞에서 인도 경찰의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물론 여느 인도 유적지와 같이, 철문 앞에서는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는 굳은 표정의 경찰 두 명이 카메라만 하나 달랑 들어 있는 나의 단출한 가방 속을 대충 살펴본 후, 들어가도 좋다는 표시로 턱을 한 번 까닥여 주었다.
가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기만 하는 인도 경찰의 소지품 검사는 언제나처럼 못 미덥다. 물론 여행자의 입장에서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술렁술렁 넘어가면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초라한 입구에 기대감을 접고 철문을 넘어 잘리안왈라 바그의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마치 차원의 문을 통과해 신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을 지나 연결된 좁은 통로 안쪽으로 조금 들어왔더니, 공원처럼 조성된 넓게 펼쳐진 광장이 나타났던 것.
그곳은 주변의 건물들이 마치 성벽처럼 안쪽의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갇힌 공간이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자면 예전 학살 사건이 있었을 당시에도 이 곳은 출구가 한쪽밖에 없는, 그래서 출구만 틀어막으면 완전히 닫힌 형태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은 공원의 출구를 막아선 채 시민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총알을 퍼부었다. 지금은 잘 조성된 조경 탓에 사람들의 평화로운 쉼터가 되어 있었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도망갈 곳이 없이 사방이 꽉 막혀있는 이 곳은 끔찍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으리라.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들어가면, 방문자를 맞이하는 두 개의 정사면체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입구 근처에 있는 정사면체는 영국군이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던 지점을 표시해 놓은 표지석. 그리고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또 다른 정사면체는 영국군에게 쫓기던 사람들이, 절박한 마지막 순간에 총알을 피해 뛰어들었던 '순교자의 우물'을 표시해 놓은 표지석이다.
입구 표지석의 각 면에는 '이 지점에서 사람들을 쏘았다'는 뜻의 영문과 힌디어 문장이 적혀 있는데, 이 위치가 바로 50여 명의 영국군 (정확히는 네팔 구르카 용병) 이 도망가는 인도의 민간인들을 향해 1,650발의 총알을 난사했던 그 자리이다. 당시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폭력행위가 없이 전반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영국 식민정부에 대한 반대 집회를 갖고 있었으나, 20분 간의 일방적인 살육으로 인해 사망 379명, 부상 1,200명이라는 끔찍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는 영국 정부의 공식 발표이며, 다른 자료는 사망자만 1,000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사망자 중 120여 명은 영국군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결국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고자 공원 안에 있는 10미터 깊이의 우물에 몸을 던지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는데, 그 우물이 바로 두 번째 표지석 옆에 있는 '순교자의 우물'이다. 표지석에는 '무자비한 (영국군의) 발포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이 우물로 몸을 던졌다. 약 120여 명의 사망자가 발굴되었다.'라고 각인되어 있다.
총으로 말미암은 죽음과 추락으로 말미암은 죽음. 어느 쪽인들 선택하고 싶었을까. 죽음의 공포에 쫓기다가 막다른 찰나에 주어진 길이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낄 절망감의 크기를, 나로서는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우물은 지금은 촘촘한 철망으로 막혀 있어, 우물의 바닥을 내려다볼 수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설사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그이들의 마지막 선택의 현장을 차마 목도할 자신은 없었다.
공원을 방문한 인도인들은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망울로 잠깐 우물 안을 내려다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들의 그 예사로운 무표정에 담긴 인도인으로써의 속생각은 유추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저 내 앞에 선 인도인의 등짝과 우물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보통의 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가질 법한 슬픔을 조금씩 곱씹어 볼 따름이었다.
공원 이곳저곳에는 당시 영국군이 발포한 36개의 탄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원의 구조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무자비하고 참혹했던 그 날의 학살을 후대에 되새겨 주고 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97년 10월 이 공원을 방문하여 30초간 추도의 예를 갖추었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2013년 2월 이 공원에서 '영국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며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두 수반 모두, 해당 사건과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당시 인도의 총리는, '여왕은 해당 사건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여왕을 옹호하였다.
진심을 담은 사과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절망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어려운 세상을, 이 공간 안에선 이해하여야만 했다. 우리 선조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사죄한다, 나라를 이끄는 자로써 우리 국민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이런 말들을 건네는 것이 나랏님에게는 죽기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이해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4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한 이유를, 그 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단에 바치는 추도의 촛불이라도 되는 것일까. 잘리안왈라 바그 중앙에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놓여 있다. 인도에서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격식 있는 모양새의 제단은,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와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희생자들의 절망이 오버랩되어 되려 어색하다.
이 제단의 이름은 가해자와 국가의 사죄 위에 세워졌어야 했다. 그래서 영원히 타오르면서, 생명과, 그 생명의 자유를 짓밟은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는 모습이어야 했다. 과연 이 장소는 인도인들에게 그런 의미와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었을까. 무표정하게 제단을 바라보며 지나쳐가는 인도인들의 마음속을, 나는 아직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이 여행이 끝날 때쯤엔 알 수 있게 될까.
시간은 어느새 오 후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들를 곳이 많은데 여행의 첫걸음부터 너무 무거워졌다 싶어 이만 잘리안왈라 바그를 떠나려는 그때, 제단 위의 불꽃을 향해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올리는 한 인도인의 모습이 나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조국'이라는 이름에 억지로 바쳐진 서글픈 민초들의 목숨줄처럼 아스라이 흔들리는 불꽃이 적잖이 애처로웠나 보다. 격식을 갖춘 그의 위로가 이 곳에 잠든 영혼들에게 조금이나마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나는 잘리안왈라 바그를 나와 어젯밤 많은 감동을 주었던 황금사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