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4 작성)
지난 8월 23일 개봉한 코믹좀비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본국인 일본에서 당초 단 2개관에서 소규모 개봉했다 입소문이 퍼진 끝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신인감독에 무명배우, 초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화제작은 어떻게 탄생했나?
예고편을 절대 보지 말고 본편을 보라는 추천사가 쏟아지는 영화 <카메라를 멈추지 마!>는 37분간의 원테이크 좀비영화가 끝나고 나면 생각지도 못했던 또다른 전개가 기다리고 있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다. 일반적인 상업영화라면 도저히 시도할 수 없을 법한 과감한 설정은 이 영화가 신인감독과 무명배우들이 모여 300만엔(약 3천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밀어붙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영화는 ENBU세미나라는 영화학교에서 개설한 ‘시네마 프로젝트’라는 장편영화 제작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ENBU세미나는 1998년 개교한 사설 영화교육기관으로 1년 과정으로 영화감독 지망생, 배우 지망생들을 선발해 교육하는 곳이다. 지난 2012년부터 ‘시네마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신인감독과 무명배우들을 선발해 매년 2편 가량의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워크숍을 진행해왔는데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는 지난 2017년 ‘시네마 프로젝트’ 제7탄으로 선정된 작품이었다.
감독 선정은 ENBU세미나의 대표이자 ‘시네마 프로젝트’ 작품 전체의 프로듀서인 이치하시 코지가 직접 하는데 이 학교 졸업생이 아니더라도 가능성 있는 신인감독이라면 열어놓고 섭외를 한다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의 감독인 우에다 신이치로 역시 이 학교 출신이 아니다. 감독이 확정된 후에는 배우 모집을 위해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는데 오디션을 통과한 배우들은 감독과 함께 약 2개월의 워크숍 과정을 통해 함께 프로덕션을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의 경우 배우들이 모두 선발된 이후에 감독이 아이템을 확정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니 감독과 배우들이 한 팀이 되어 다같이 만들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의 경우 드라마나 소설, 만화 등 원작을 기반으로 2차 창작된 영화가 상업영화 기준 9할에 달한다. 원작의 인지도와 검증된 스토리에 기대어 안정적인 흥행을 기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우선적으로 투자를 받고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는 분명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수작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나 영화의 만듦새에 있어 아무래도 어설픈 구석이 눈에 띄는 작고 소박한 영화다. 지금 이 작품이 가진 잠재력 이상으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일본 관객들이 기존의 일본영화들이 만들어져 온 패러다임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고 새로운 이야기, 참신한 스토리텔러를 원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겠다.
한국에도 ENBU세미나처럼 장편영화 제작과정을 통해 신인감독들의 등용문 역할을 해온 영화학교들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교육기관인 한국영화아카데미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봉준호, 최동훈, 허진호 등 한국 최고의 감독들을 배출해 온 국내 최고의 영화교육기관 중 하나인데 지난 2006년 장편연구과정을 개설한 뒤 현재까지 총 30여편의 저예산 장편영화를 꾸준히 제작해왔다.
영화아카데미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 작품을 선정한 뒤 교수진과 연출자가 함께 시나리오를 발전시킨 후 1억 미만의 예산으로 제작을 진행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상업적인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창작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져 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감독들의 상업영화 데뷔작이 시간이 멈춘 세상을 그린 <가려진 시간>,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SF <사냥의 시간>, 늑대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동화 같은 멜로드라마 <늑대소년>이라는 점에서 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은 한국영화계가 더욱 다채로워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8월 23일 개봉해 호평 속에 상영 중인 <어른도감>, 그리고 오는 9월 개봉을 앞둔 <죄 많은 소녀> 역시 영화 아카데미 장편과정을 통해 제작된 작품들이다.
<공동경비구역JSA>, <건축학개론>등을 제작해온 한국영화의 명가 명필름에서 2015년 설립한 명필름랩 역시 신인감독을 발탁해 장편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다. 연출, 시나리오, 제작, 촬영 등 다양한 분야의 지원자들을 선발해 1년간 함께 프로젝트를 개발한 후 이후 1년간 본격적인 프로덕션을 추진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1기 프로젝트인 조재민 감독의 <눈발>, 이동은 감독의 <환절기>, 2기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던 이환 감독의 <박화영>이 개봉했으며 3기 작품인 전지희 감독의 <국도극장>이 이동휘, 이상희 등 배우 캐스팅을 마치고 현재 촬영 진행 중이다. 아직 작품 수는 적지만 상업영화 제작사로서 다져온 명필름의 저력이 명필름랩의 신인감독들과 어떤 시너지를 낼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2018.9.4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