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18 작성)
한국인의 소울푸드는 무엇일까?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혹은 치킨이나 짜장면 등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매콤달달하고 쫀득한 떡볶이를 꼽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올해 초 모 음식평론가가 ‘떡볶이는 맛없는 음식’이라고 주장했을 때 논란이 뜨겁게 일었던 이유도 그만큼 떡볶이가 우리에게 존재감이 큰 먹거리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차려 먹는 한끼 식사가 아닌 분식이자 간식이고 특히나 학창시절의 추억과 우정을 상기시키는 대표적인 메뉴로서 떡볶이가 갖는 이런 특별한 정서는 한국영화에서 어떻게 활용되어 왔을까?
영화 <너의 결혼식>은 전학생 환승희에게 한 눈에 반한 주인공 황우연의 십년에 걸친 첫사랑 연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은 떡볶이 매니아인 승희를 따라 매번 수업을 땡땡이 치고 떡볶이집으로 향한다. 여기서 우연은 승희와 가까워지고 또 택기의 괴롭힘을 피한다는 얄팍한(?) 구실을 내세워서이긴 하지만 승희로부터 ‘사귀자’는 허락까지 얻어낸다.
이후 뜻밖의 사건으로 헤어지게 된 우연이 승희와 재회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 역시 떡볶이다. 승희가 다니는 대학에 무작정 입학은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방법을 골몰하던 우연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학교 주변 떡볶이집을 뒤지는 것. 우연의 생각은 적중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된다. 이 장면은 실제 떡볶이집에서 촬영했는데 서울 청량초등학교 근처 무우떡볶이라는 곳이라고. 전부터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등 유명했는데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더욱 인기라고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떡볶이집 씬은 한국영화에서 가장 여러 번 패러디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학교 앞 떡볶이집의 섹시한 여주인이 주인공인 남고생을 유혹한다는 과감한 설정과 주인공 현수 역을 맡은 권상우의 풋풋한 매력, 그리고 떡볶이집 주인을 연기한 김부선의 농염함이 어우러져 개봉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극 중 고등학교 이름인 정문고를 유하 감독이 졸업한 상문고에서 따 왔을 정도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극화한 영화다. 배우 김부선이 이 영화에 캐스팅된 후 극 중 떡볶이집 주인의 행동이 너무 비정상이라고 느껴져 고민하자 유하 감독이 이 에피소드 또한 자신의 실제 경험담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는 후문이 있다. ‘못잊어 떡볶이’라는 떡볶이집 역시 상문고등학교 옆에 있던 메트로분식이라는 곳을 모델로 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폐점해 찾아가볼 수는 없다고.
서로를 절대 믿어서는 안되는 범죄자와 경찰이 상대를 믿고 감정에 흔들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파국을 그린 영화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극중에서 세비로 차림의 깡패 두 사람, 재호와 병갑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만난 장소가 바로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이 우글거리는 떡볶이집이다.
변성현 감독이 조직 내부 쿠데타를 모의하는 두 사람이 접선할 법한, 듣는 귀가 없는 안전한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 고심하다 고른 장소라고. 원래는 31개맛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를 가장 먼저 떠올렸지만 섭외가 어려워 유사한 느낌을 주는 떡볶이집으로 결정한 것.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은 신림동 녹두거리 미림여고 앞에 위치한 미림분식이다. ‘불한당원’이라 자처하는 매니아 관객들이 성지순례 하듯 이 곳을 찾는다는데 영화에서 재호와 병갑이 앉았던 자리는 8번 테이블이라고 하니 방문할 생각이 있는 이들은 참고해도 좋겠다.
한겨울 텃밭에서 뽑아낸 배추로 만든 된장국, 눈 치울 때 그만인 김치 수제비, 가벼운 나들이갈 때 준비해가면 좋은 쌈밥 도시락, 엄마만의 비법 레시피로 만든 감자빵 등 차례차례 등장하는 음식이 곧 스토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 <리틀 포레스트> 극중에서 주인공 혜원이나 엄마가 아닌 다른 인물이 요리하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오는데 바로 친구 은숙이 떡볶이를 만들 때다.
요리에 능숙하지 못한 은숙도 나름대로 자신 있게 만들 수 있고 또 어릴 때부터 함께 부대끼며 자라온 소꿉친구 혜원, 은숙, 재하의 우정을 잘 보여주는 메뉴로 떡볶이 이상의 선택지가 있었을까? 결국 너무 맵게 만들어져 눈물을 쏟아내며 먹는 바람에 재하로부터 “둘이 싸웠어?”하는 오해를 불러오긴 했지만 말이다.
잠시 쉬어 가도, 달라도, 평범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요리를 못해도, 재료가 좀 모자라도 괜찮으니 마음 내킬 때 떡볶이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영화처럼 소꿉친구를 불러다 나누어 먹으면 더 좋겠다.
(2018.9.18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