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7 작성)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요즘,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영화 한 편과 함께 몸도 마음도 덥혀 보는 건 어떨까?
영하 54도의 극한 상황에서 1년 반을 갇혀 지내야 하는 곳, 남극기지 대원들을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쉐프의 이야기를 그린 <남극의 쉐프>. 특대 에비후라이, 활활 타오르는 직화로 구워낸 스테이크 등 갖은 화려한 요리가 등장하지만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메뉴는 바로 라멘이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 고립된 상황에서 오는 괴로움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모두가 둘러 앉아 나누는 따끈한 라멘 한 그릇은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강력한 치료제나 다름없다.
영화 <집으로>에서 닭백숙은 도시에서 자라온 철딱서니 없는 손자와 시골에서 한평생 살아온 외할머니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 코믹하게 보여주는 소재이자 애틋하고 투박한 외할머니의 사랑 그 자체다. 극 중에서 어린 상우는 물에 빠진 닭이 싫다며 엉엉 울며 드러누웠지만 양은 사발에 턱 올려진 백숙의 제 맛을 아는 우리들 눈에는 보기만 해도 기운이 나는 한 그릇이다.
서로의 남편,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동안, 그들은 혼자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화양연화>에서 첸부인이 매일같이 우아한 치파오 차림으로 보온통에 담아온 것, 그리고 차우가 아내의 거짓말을 삼키듯 씹어 넘긴 음식이 바로 새우완탕면이다. 무협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첸부인과 차우. 어느새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이가 된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일 역시 완탕면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영화 <우동>은 꿈을 이루는데 실패한 주인공이 우동의 본고장인 고향에 돌아와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진짜 중요한 것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코미디언의 꿈을 이루건 못 이루건, 아버지의 맛을 재현하건 못 하건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시작한 지 5분만에 후루룩 우동 먹는 장면이 등장해서는 끝날 때까지 쉼 없이 먹방이 이어진다. 배고픈 상태에서는 절대 보면 안 되는 영화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몰락한 정치깡패 안상구가 아지트인 옥상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은 의정부고 졸업사진 아이템으로 등장했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잘린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서툰 젓가락질을 하는 모습이 끈 떨어진 신세의 처량함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고로 라면이란 휴대용 가스버너에 양은냄비를 올려 끓여야 제 맛이란 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016.10.27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