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읽고
대학원 시절 초반에 친하게 지냈던 일본인 친구가 있다. 그는 일본 금융청에서 일하던 공무원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유학을 나와 있었다. 둘 다 직장을 다니다가 늦은 나이에서야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고, 공공부문에서 일했으며, 바로 이웃 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빠르게 친해졌다. 그때부터 야근, 근로시간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링크) "너희도 야근이 많다고 들었는데 주로 무슨 일 때문에 야근을 해?"라고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에서 첫 번째 단어를 듣는 순간 '야, 너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면서 즉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단어는 바로 Parliament(국회)였다.
지금도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국회 국정감사나 상임위원회 회의가 있기 전날에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회의 당일에는 국회 의사중계시스템을 통해 국회의원들의 아무 말 대잔치를 들으며 추가로 대응해야 할 질문이 나오지 않기만을 기원하는 문화가 남아있다. 그렇기에 일본인 공무원의 국회 대응을 위한 야근에 공감할 수 있었고, 대의민주주의에서 마땅히 존중해야 할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할많하않에 가까운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노한동 작가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위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서기관 출신인 작가는 10년 동안 일해왔던 공직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퇴직 후 이 책을 썼다. 사실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작가를 브런치에서 구독하고 있었고, 브런치에서 맨 처음 해당 매거진을 접하던 날에 금세 글 내용에 빠져들어 모든 글을 다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이 책의 출간을 누구보다도 마음속으로 환영하였다.
내가 공무원은 아니지만 체감상 책 내용의 절반 정도는 비슷한 문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사소한 언론 보도에도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반응하는 고위층이나 부서 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과별 서열 등이 그러한 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심금을 울렸던 부분은 바로 '보고서에 정답은 없다'라는 제목을 한 4장이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상급자가 연필로 수정한 단어와 문장을 겨우 해독한 후 한글 프로그램에 입력하면서 자괴감에 시달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보고서에 들어갈 내용과 체계에 대해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보고서 쓰는 방식과 선호하는 표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보고서에 필요한 내용만 다 들어가 있다면 나머지는 전적으로 취향 차이로 생각하자고 일찌감치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에 괜히 나의 자아를 투영하지 말고 웬만하면 맞춰주자.'는 원칙을 세우긴 했는데 사실 아직도 위에서 고쳐댈 때마다 씁쓸한 기분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책은 아주 영리해서 체계적으로 무능한 공무원들의 모습을 냉소적이지만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숨만 나오는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건배사를 술자리에서 항상 외치지만 막상 보여주기식 행사에 불과한 고위층과 현장 간 간담회나, 민감한 정책현안에 대한 결정을 미루기 위해 연구용역 발주 등으로 최대한 시간을 끄는 관행 등을 보면 자연스럽게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책 제목인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이러한 관료들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문구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썩소를 짓다가도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건 비단 공무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다니는 회사, 더 넓게는 대한민국 전체 사회에도 해당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문제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짜노동이 만연하고, 상명하복을 중요하게 여기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고,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는 그런 문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공무원이 아니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고민해 볼 지점이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한 대안도 인상 깊게 읽었다. 특히 전문성 있는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순환보직 제도의 개선에 눈길이 갔다. 여기서 제시된 정도의 대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시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료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할 수 있는 점을 모색한다면 관료 사회,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사회가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 제목 사진 출처: https://www.mk.co.kr/news/society/7857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