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2008년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야근을 기본 덕목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분위기가 회사마다 다르고 같은 회사 내에서도 팀별로 달랐지만, 대체로 적어도 1주일에 세 번 정도는 저녁식사 후 밤 8~9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정말 바쁠 때는 밤 11시, 12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었고 새벽 서너 시가 넘어서 퇴근한 적도 1년에 두세 번씩은 있었다. 물론 주말에도 가끔씩 회사에 나갔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내가 특별히 야근을 많이 하는 축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장 급한 일도 없는데 상급자의 눈치를 보느라 야근을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야근을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학부 때 노동경제학을 재미있게 수강했고 대학원에 지원할 때도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학업계획서(SOP)에 한국인들이 장시간 일하는 원인을 연구해 보고 싶다고 썼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금 돌이켜 보면 주제 자체는 흥미롭긴 하지만 탑 저널에서 주목할 정도로 큰 의미를 갖는 주제는 분명 아니었다. 나중에 대학원에서 교수들과 면담을 했을 때 이런 측면을 솔직하게 얘기해 준 교수도 있었다.
MRes 2년차에 처음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해야 했던 시기에 어떤 주제를 연구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 주제를 다시 들고 나오게 되었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문헌을 찾아보니 200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레스콧(Edward Prescott)이 쓴 논문을 비롯하여 국가별 근로시간을 결정하는 경제학적 요인에 대한 연구가 꽤 있었다.
2020년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은 연간 근로자 1인당 평균 1,809시간으로 OECD에서 네 번째로 높았다. OECD 회원국 중 콜롬비아, 멕시코, 코스타리카가 우리나라보다 일을 많이 하지만 이들 국가는 우리나라에 비해 국민소득이 낮다. 근로자 1인당이 아닌 생산가능인구(15~64세에 해당하는 인구로 취업자, 실업자 및 비경제활동인구를 모두 포함) 1인당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순위가 좀더 낮아지긴 하지만 그래도 OECD에서 10위 안에 들기 때문에 웬만한 선진국에 비해 일하는 시간이 긴 편이다.
근로시간의 결정 요인을 연구한 경제학 논문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근로시간 비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체로 미국인들이 유럽인들에 비해 더욱 길게 일하는 이유는 유럽의 근로소득세율이 미국보다 높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근로소득세율이 높다면 세전으로는 같은 임금을 받더라도 세후 임금이 더 낮기 때문에 일할 의욕이 떨어지고 따라서 짧은 시간만을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논문에서 가정하고 있는 기본 전제 중에는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모든 노동자가 본인의 근로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가정도 포함되어 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북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을 비교하면서 위 결과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북유럽 국가의 소득세율이 서유럽 국가보다 높은데도 근로시간이 더 길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으로 사회복지 지출 수준을 제시하였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북유럽 국가에서는 사회복지 지출 수준이 높고 국가에서 무료 또는 낮은 가격으로 보육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둔 부모들이 노동시장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외에도 많은 연구가 있지만 중요한 점은 거의 모든 논문이 미국과 유럽 국가의 근로시간에만 집중을 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들 연구의 범위에서 대부분 벗어나 있었고 혹시 포함되더라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관측치(outlier)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을 비교해 보면 한국의 근로소득세율이 미국보다 높고 사회복지 지출은 비슷한 수준인데도 한국의 근로시간이 미국에 비해 월등히 길다. 위에서 설명한 두 가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미국인들보다 짧은 시간을 일하는 게 맞는데 말이다. 이는 기존의 근로소득세율이나 사회복지 지출 수준 이외에도 근로시간을 결정하는 다른 중요한 요인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시작된 나의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의 한 챕터로 들어가 있긴 하지만 아직 미완성(work in progress)인 상태다. 나 자신도 임시로 논문에서 제시한 가설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형을 추가해 논문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 계획이다.
논문에 포함시켜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유력하게 생각하는 가설은 문화적 또는 역사적 요인이다. 급속 성장이 이루어짐에 따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업무 성과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거나 관리자들이 업무 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성과보다는 보이는 노력을 기준으로 업무 실적을 평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최대한 늦게까지 남아서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는 데 이롭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근로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이 가설을 어떻게 모형으로 만들거나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는 많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근 도입된 주 52시간 근무제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기사가 언론에 많이 보도되면서 근로시간이라는 지표가 우리에게 더욱 익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사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근로시간은 주 40시간 이내고 초과근로시간이 주 12시간으로 제한되는 것인데 여기에 '주 52시간 근무제'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암묵적으로 모든 근로자들이 주 12시간의 초과근로시간을 매주 채울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고용할 때 기업의 추가 비용 부담이 크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렇게 모든 근로자들이 주 52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직원을 더 뽑거나 업무의 우선순위를 조정하여 필요없는 일을 줄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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