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고
얼마 전 대법원은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는데 그 결정문에 미국 연방대법원의 2000년 대선 재검표 관련 판결을 인용하였다. 당시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 상황을 다룬 뉴스를 보면서 미국 대선이 직접선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학 시절 어떤 책에서 미국 상원의원의 임기가 6년이고 2년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 전체 상원의원의 1/3을 교체한다는 사실을 읽었을 때도 다시 한번 놀랐었다. 미국은 당연히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러한 제도는 그에 걸맞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저자들도 책의 뒷부분에서 이와 비슷한 지점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의 선거인단 제도, 인구수에 상관없이 모든 주에 2명씩의 의원이 할당된 상원, 종신 재직권을 받은 판사들로 구성된 대법원 등으로 인해 다수 국민의 의지가 정치적 영역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이러한 제도는 시골 지역의 이익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는데 21세기 들어 공화당이 이들 지역에서 지지율이 높아지면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과거 미국 정치에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 법을 이용하여 흑인들의 투표권 행사를 교묘하게 방해했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최근 트럼프와 공화당이 백인 우월주의 정서에 기대어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폭동을 조장하면서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였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우리나라도 아닌 미국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고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 교수들이 엄밀하고 학술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이지만,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고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내용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술술 읽혔다. 총 8개의 장 중 일부의 제목이 ‘이 땅에서 벌어진 일’(3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4장), ‘표준 이하의 민주주의, 미국’(7장) 등인데 제목에서부터 저자들의 분노가 대놓고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 분노가 상식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공감할 만했기 때문에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격하게 공감을 했던 부분은 ‘독재의 평범성’이라는 제목을 단 2장이었다. 저자들은 이 장에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이들은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하는 정치 내부자들’이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고 법을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사용하며 법을 선택적으로 집행하고 정적을 겨냥한 새로운 법을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사실상 독재 체제를 수립한다. 책에서는 헝가리의 오르반 정권을 법을 무기로 사용하여 독재 정권으로 거듭난 대표적인 사례로 묘사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렇게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작년 12월의 계엄과 이 책이 공통적으로 주는 교훈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유난히 헌법 수정이 어렵고 헌법을 신성시하는 태도가 널리 퍼져 있다 보니, 18세기 건국 초기에 정치적 타협을 위해 헌법에 포함된 독소 조항이 아직까지 남아서 부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개혁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미국 시민들이 활발하게 민주주의의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최근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슬기롭게 막아냈고 앞으로도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충분히 유효한 조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 제목 사진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81%EC%83%89%EC%A3%BC%EC%99%80_%EC%B2%AD%EC%83%89%EC%A3%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