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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40대에 다시 읽어보니

by Muswell

초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빌려오신 삼국지(이문열 번역)를 중간 정도까지 읽은 적이 있었다.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초등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꽤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 삼국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내용은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대학교 때 수강해야 했던 국어 수업의 과제 중에 삼국지 독후감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그 과제를 읽어 보아도 삼국지의 내용 흐름과 결말이 정확히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삼국지 영걸전 게임을 가끔씩 하면서 내용을 되새기고 중간에 검색도 해보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작년쯤에 이문열 번역 삼국지의 개정판이 발간되었고 이를 밀리의 서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보자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열 권이나 되기도 하고 40대가 된 지금 이 책을 읽는 게 의미가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그동안 선뜻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웃기게도 미국에 도착한 직후 시차적응을 하는 과정에서 '잠도 안 오는데 책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하여 약 두 달 만에 10권까지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니 왜 내가 삼국지를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삼국지연의의 시작인 황건적의 난부터 위, 촉, 오 세 나라가 사마염의 진에 의해 통일되기까지의 기간은 약 100년이었다. 유비와 제갈량은 이 중 약 40년 및 5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사망하는데, 이 내용은 각각 9권 초반과 10권 중반에서야 다루어지고 있다. 즉, 제갈량이 죽은 후의 50년은 너무 짧고 압축적으로 서술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설사 예전에 이 부분까지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문열은 이에 대해 삼국시대 전반부의 인물들과 그 서사가 너무 매력적이다 보니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이야깃거리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챗 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실제 삼국지연의도 후반부가 짧게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분량을 단순히 비교해 보면 이문열이 유달리 짧게 압축을 한 것으로 보인다.(삼국지연의: 전체 분량의 13%, 이문열 번역본: 6~7%)


삼국지는 세 나라가 땅따먹기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투와 전쟁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민방위 훈련까지 마친 아저씨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투 내용이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전투가 양쪽의 대장 또는 부장이 맞붙어서 한쪽의 대장이 이기면 상대편 군사들도 적어도 반토막이 나면서 사실상 끝나는 전개였다. 또는 양쪽의 장수가 붙었다가 한쪽의 장수가 일부러 밀리는 척하면서 다른 쪽 장수를 유인한 다음 복병을 통해 제압하는 방식도 너무 많이 묘사되었다. 우리가 이름을 알 정도의 장수가 아닌 일반 군사들은 사실상 숫자만 채우는 NPC에 가깝게 취급되는 것이다. 과연 일반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기는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이유는 아마 세 국가의 무자비한 동원 체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가 소설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과장은 있겠지만 삼국지에는 10만, 20만 대군이 예사로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대륙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쟁에서 져서 대부분의 군사를 잃더라도 짧은 시간 내에 다시 대규모의 군사를 모으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지배층들만의 영토 싸움에 그 당시 중국의 백성들이 그만큼 많이 희생되고 수시로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웠다. 이렇게 숫자만 늘리는 식으로 징병을 하다 보면 일반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장수들 간의 맞짱으로 승패가 결정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문열 번역본은 중간중간 인물에 대한 평가가 강하게 들어가 있어 호불호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외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문열은 조조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반면 유비에 대해서는 환상을 걷어내려고 노력한 편인데, 이러한 평가가 괜찮게 보이기 시작한 걸 보면 나이가 들면서 조조 같은 지도자에 대한 비호감이 상당히 줄어든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유비와 조조 중 어떤 지도자를 선호하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덕장인 유비를 선택하겠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검색을 하다가 놀랍게도 『사십에 읽는 삼국지』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고전으로서 가치가 높고 40대가 되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이라는 뜻일 텐데, 이번에 다시 읽고 나니 솔직히 그렇게까지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장 책사들이 어떻게든 다른 나라를 속여먹을 궁리만 하고 신들린 듯한 말발(책에서는 보통 '썩지 않은 세치 혀'로 묘사된다.)로 그걸 실행 또는 정당화하는 모습이 배울 만한 장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책의 기준인, 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고 여러 번 읽게 되면 읽을 때마다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에 부합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 제목 사진 출처: https://blog.aladin.co.kr/boslbee/4479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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