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지 벌써 석 달이 되었다. 그동안 처리한 수많은 일 중 덩치가 큰 것들만 나열해 봐도 은행 계좌 개설, 집 구하기, 차 사기, 아이 학교 등록, 회사 온보딩 프로세스, SSN(사회보장번호)과 운전면허증 신청 등이 있다. 각각의 과정에 대해 글을 하나씩 쓸 수 있을 정도로 우여곡절이 넘쳐나지만, 딱히 교훈도 감동도 없이 징징거림이나 미국에 대한 욕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 글 쓰는 건 과감히 생략하겠다. 어찌 되었든 소위 '초기 정착'과 관련된 과제는 대부분 마친 셈이다.
분명 한국에서 일할 때는 팀에서 팀장 다음 직급이었는데 여기에 와서는 한국인의 경우 주로 이 회사에 근무하시는 선배들을 만나고 인사를 드리다 보니 이 분들을 만날 때는 다시 신입직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특히 직장에 대한 조언에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조언까지 더해지다 보니 그런 기분이 더욱 크게 들었다. 신기하게도 같이 일하는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나이를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서로 이름을 부르다 보니 직급이 높더라도 상사라기보다는 동료라는 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들었다. 이 차이가 나이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는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같은 나라 출신의 후배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들었던 조언의 내용은 대동소이했지만 한 선배가 유독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조언을 전해줘서 기억에 많이 남았다. 우선 정해진 기간 동안만 미국에 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달성해야 할 목표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만약 그 목표가 여행을 포함하여 미국 생활을 최대한 즐기다 가는 것이라면, 3년이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히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도 하였다.
워낙 팔랑귀이다 보니 처음에는 조언의 두 번째 부분인 '여행'에 혹해서 '당장 남은 여름과 추수감사절, 연말 연휴 때 어디든 예약을 해서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조바심이 났다. 슬쩍 아내에게 운을 띄워 봤더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숙박을 동반한 가족 여행이 많아야 1년에 두세 번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이 반응에 서운함을 느꼈던 것도 잠시, 익숙하지 않은 일이 몰려들면서 정신없는 8월을 보냈다. 일은 조금만 하고 최대한 놀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에 집에서도 일을 해야 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일이 많긴 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정작 주목해야 했었던 조언은 첫 번째 부분인 '목표 설정'이었다는 사실을. 다른 말로 하면 '우선순위 정하기'이다. 3년간의 미국 생활에서 어떤 것을 얻어가야 하는지, 일과 가정생활 중 어떤 것을 우선에 두어야 할지 등을 치열하게 생각해 보고 상황에 맞게 그 우선순위를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아내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난 10년 간의 결혼생활 동안 내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훌륭하게 중심을 잡아주었던 사람인데 역시 이번에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미국 생활에만 적용할 원칙은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뿐 인생도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우선순위를 생각하면서 살다 보면 너무 피곤하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서 여러 가지 상충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늠해 보는 습관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마침 유노윤호가 제시한 세 번째 레슨이기도 하다.) 삶의 중심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제목 사진 출처: https://namu.wiki/w/NOIR%28%EC%9C%A0%EB%85%B8%EC%9C%A4%ED%98%B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