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swell Jan 17. 2021

영국 경찰이 집에 찾아왔다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아동 학대 사건이 방송되면서 아이의 양부모와 경찰에 대한 분노가 높아지고 있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아내가 처음으로 나에게 브런치 글 청탁을 했다. 런던에서 우리 가족이 겪었던 아동 학대 관련 일화를 적어 보라는 것이다.(물론 나와 아내가 아동 학대를 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일화는 10개월 된 아이를 한국에서 런던으로 데려온 다음 날에 있었던 일이다. 내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9개월 정도 처가에서 아빠 없이 지내고 있었다. 애초에 한국에 가서 아이를 낳을 때부터 아내와는 아이의 첫 돌 정도까지만 한국에 있고 그 후에는 영국으로 같이 가서 살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상 최악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8년 7월 말, 우리 가족은 12시간의 비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그 해 여름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북반구 전체가 심한 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런던도 예외가 아니라서 도착한 날 최고 기온이 33도였고 다음 날은 35도까지 올라갔다. 참고로 런던은 여름에도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이 보통 열흘이 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한 여름 날씨를 자랑한다. 이 말은 도시 전체가 여름 더위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집은 거의 없었고 미니 선풍기가 아닌 성능 좋은 선풍기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가족들과 같이 살기 위해 구해놓은 기숙사에도 두 달 전 덥지 않을 때에 이사를 한 탓에 선풍기를 구비해 놓지 못했다.


온 가족이 시차 적응이 안 되어 해롱대던 도착 다음 날 오후 2시, 온도는 이미 30도를 넘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아이가 이미 잠들었어야 할 밤 10시였다. 아이는 피곤한 지 나에게 안아달라고 칭얼댔다. 그런데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아무리 커튼을 쳐도 바깥이 너무 밝아서 아이가 잠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유난히 울음이 우렁찼던 아이는 내 품에 안겨서 울기 시작했다. 전날 비행기에서도 서너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계속 아이를 안고 있었던 탓에 쌓인 피로에, 무더위에,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지면서 나와 아내의 정신은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건물 전체가 떠나갈 정도로 울면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여성 경찰관이 두 명 서 있었다. 아동 학대가 의심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다. 경찰관 한 명은 내 인적 사항과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고 다른 경찰관은 자연스럽게 아이와 아내를 나한테서 분리해서 따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내의 기억으로는 내 설명을 듣고도 경찰관의 얼굴에서 불신의 표정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었는데 아이가 계속 울면서 나를 애타게 찾자 그때서야 수긍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동 학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경찰관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아들은 드디어 울다 지쳐서 잠들 수 있었다.


사실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순수하게 아동 학대가 걱정되어서 신고를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기록적인 더위 탓에 짜증이 높아져 있는 상태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계속 들리니 신고를 해버린 게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억울하게 의심을 당한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의심되는 상황이 생겼을 때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이 출동하여 실제 상황을 확인하는 문화는 당연히 아동 학대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일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영유아 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생긴 일이다. 영국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가족이 살던 구(borough)에서는 어린이 보호 프로그램에 등록을 하면 정기 검진을 받고 아동복지시설(children's centre)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이런 복지 혜택이 있는지 전혀 몰랐는데 아동복지시설에 데려가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아이를 한 번 데려갔다가 등록을 하고 정기 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약속한 날짜에 아내와 함께 검진을 받는 곳으로 갔다. 간단한 인적 사항을 확인한 후 사회복지사는 아이의 발육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면서 아이의 옷을 전부 벗기라고 말했다. 추운 겨울이기도 했고 급히 집에서 나오느라 새 기저귀를 가져오지 못해서 난색을 표했지만 사회복지사는 괜찮다며 단호하게 다 벗기라고 강조했다. 끝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동 학대의 흔적이 아이의 몸에 나타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에서 잘 드러나듯 영국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진에서 아기의 옷을 다 벗기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던 데는 결국 아동 학대를 방지한다는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유아 검진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한 후 형식적인 1~2분 정도의 상담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국에서는 신체 발육상태를 확인한 후에도 아이의 발달 상황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집에 직접 방문하여 아이의 양육 환경을 살펴보고 가기도 하였다. 정식으로 프로그램에 등록을 해야 한다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지만 (아이를 등록하지 않아도 페널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동 복지에 체계적으로 신경을 써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학 생활 중에 절실히 느낀 사실 중 하나는 영국이 우리나라에 비해 1인당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선진국은 아니고 더 살기 좋은 나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아이의 양육과 관련된 정부 정책과 아동 학대를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 면에서는 영국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이 집에 출동하고 검진 때 아이의 옷을 전부 벗겨야 하는 사태가 발생해도 웃어넘기며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477592735480367773/

이전 16화 경제학 박사가 받는 대표적인 오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