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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May 01. 2021

영국 음식이 그렇게 맛이 없다던데?

영국에 6년 살고 미각을 잃었다.

영국 음식에 대한 악평은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굳이 내가 이 주제로 글을 하나 더 쓰는 것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간혹 '듣던 것과는 달리 꽤 먹을 만하던데?'라는 반응도 찾을 수 있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의 글은 영국 음식이 맛없다는 소문을 실제로 확인하는 내용이다.


그런 나라에서 용케도 6년을 버텨내고 작년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웬만한 음식은 모조리 맛있게 느껴졌다. 나트륨 함량을 보면 먹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조차 맛있었다. 그리고 식탐은 유학 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아마 나이가 든 탓도 있겠지만 영국에서 6년을 살았던 것이 나의 미각과 식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우선 영국 음식이 정말 맛이 없는지를 나에게 묻는다면 대답할 때 살짝 고민을 할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몇 안 되는 영국 음식들은 대부분 나중에 다시 생각날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먹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하게 맛이 없거나 비위가 상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먹어봤던 영국 음식을 대략 나열해 보면 피시 앤 칩스, 로스트 치킨, 블랙 푸딩,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각종 파이, 스카치 에그 등이었는데 이 중 다시 먹을 수 없겠다 싶은 음식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먹고 싶은 음식도 아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영국 음식의 맛을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는 edible(먹을 수 있는)이라고 생각한다.


샌드위치가 영국 백작의 이름이니 샌드위치도 영국 음식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이 주장이 맞다고 쳐도 내가 영국에서 먹은 웬만한 샌드위치는 잘 봐줘야 edible한 수준이었다. 내가 영국에서 그나마 즐겨 먹었던 샌드위치는 Pret a Manger라는 체인의 '바게트' 샌드위치였고, 작년에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코로나 19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며 하루 묵었던 격리시설에서 나온 샌드위치를 먹고 맛있어서 깜짝 놀랐던 점을 감안할 때 '영국 음식으로서의 샌드위치'에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학교 언어교육원(language centre)에서 수업을 들을 때 영국인 선생님에게 '왜 영국의 음식은 이 모양이냐'라고 직설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분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습으로 유럽으로부터의 물자 수송이 끊기면서 식재료가 제대로 공급이 안 되어 그냥 영국 내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대충 음식을 해 먹는 게 습관화된 것 같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반드시 2차 세계대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무심한 편이긴 했다. 실제로 몇몇 조사에 따르면 17~33%의 영국인들이 최근 2년간 매일 똑같은 음식을 점심으로 먹었다고 한다.(링크)


역설적으로 음식 관련 콘텐츠는 곳곳에 넘쳐났다. 텔레비전에서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수시로 방영되었고 특히 베이킹 오디션인 The Great British Bake Off는 방송사까지 옮겨가면서 무려 11년 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슈퍼마켓 체인 중 하나인 웨이트로즈(Waitrose)에서는 매달 음식 조리법, 식재료 이야기, 음식과 얽힌 영국 유명인들의 사연, 가 볼 만한 식당 등의 기사로 가득 찬 잡지를 발행한다. 회원 가입을 하면 무료로 이 잡지를 가져갈 수 있었는데 워낙 음식 사진이 워낙 선명하고 예쁘게 나와 있어서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매달 집에 가져다 놓곤 했다. 어느 날 이 잡지를 아이에게 보여주다가 읽게 된 기사에서 영국의 바닷가 마을 한 곳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어업이 발달해서 신선한 생선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피시 앤 칩스가 맛있다는 내용을 보면서 '영국의 음식 문화는 정말 척박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았던 런던에서는 이렇게 부족한 음식 문화를 외국 음식들로 힘겹게 메꾸고 있었다. 거주인구 중 37%가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링크)일 정도로 런던은 국제화된 도시이고 그만큼 세계 각국의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급 레스토랑만 놓고 보면 런던은 오히려 미식의 도시라는 평을 얻고 있기도 하다. 불행히도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고급 레스토랑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고 대신 영국의 빈약한 음식 문화와 세계 각국의 음식이 만나서 탄생한 각종 하위 호환 버전의 음식을 섭취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고등학교 때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스파게티가 처음으로 학교 급식으로 나왔을 때 과연 스파게티는 어떤 맛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음식은 스파게티가 맞는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내가 어떤 음식을 먹으면서 6년 동안 연명하였는지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유학생활 첫 2~3년 정도는 학교 식당에 자주 갔었다. 학교가 크지 않아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식 식당은 딱 두 군데 있었고 간단한 샌드위치와 샐러드 등을 파는 카페테리아가 여러 군데 있었다. 정식 식당 중 한 군데는 유학생들이 많은 학교임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매일 메인 메뉴 세 가지가 세계 각국의 음식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이 메뉴가 실제 그 나라의 음식과 비슷하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한국 음식이 나온다는 날에 식당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세 가지 메뉴 모두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메뉴 이름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그냥 소고기 또는 돼지고기 요리 한 가지, 닭고기 요리 한 가지, 채식 메뉴 한 가지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 기타 누들이나 피자, 피시 앤 칩스 등을 먹을 수 있는 코너도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음식이 맛있지도 않고 양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클래스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자꾸 마주치는 게 불편하여 언제부턴가 거의 가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학교 식당도 요일별 일부 고정 메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먹을 만한 음식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씩 스테이크(화요일)나 피시 앤 칩스(금요일)를 싼 가격에 먹기 위해서만 갔다.


학교 주변은 시내 중심부라 외식 물가가 꽤 비싼 편이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추가 요금(service fee)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보통은 음식을 포장(take away)하여 학교에 가져와서 먹었다. 주로 사 먹었던 음식은 와사비의 메뉴들(상호는 일본 음식점이지만 사실 한국 교포가 만든 체인이고 메뉴도 한국과 일본 음식이 섞여 있었음), 중국식 볶음밥, 이탈리아 음식점의 파스타, Pret a Manger의 바게트 샌드위치, 맥도널드 햄버거 등이었다. 또 슈퍼마켓에서 파는 샌드위치, 덮밥, 샐러드 바 등의 점심 메뉴(meal deal)를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메뉴를 보면 알겠지만 주로 외국 음식, 그중에서도 아시아 음식을 먹고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괜찮은 음식점을 학교 주변에서 발견하기 힘들다 보니 위에서 언급한 음식점을 돌아가면서 1주일에 한두 번씩 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Big Bang Theory)에서 요일마다 메뉴 정해놓고 먹는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외식의 선택지가 별로 없는 런던에서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점이 런던 시내에도 꽤 늘어나는 추세였다. 학교 근처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내가 가본 한국 식당만 7개였다. 물론 토종 한국인인 나에게는 가격, 맛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할 때나 한국 음식점에 갔었다. 몇몇 친구들이 불고기나 잡채 같이 안전한 음식을 시켜놓고 학교 근처의 한국 음식점을 서로 비교하면서 여기가 더 맛있네 어쩌네 하며 떠드는 동안, 나는 외국인들이 절대 시키지 않는 부대찌개나 순대국밥을 조용히 먹으면서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도 난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recipes.timesofindia.com/recipes/fish-and-chips/rs59736398.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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