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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May 10. 2021

영어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이란?

내가 2년 동안 카투사로 군 생활을 했고 6년 동안 영국에서 대학원을 다녔다는 얘기가 어쩌다 나오면 영어를 아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저 오해를 풀어줄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그냥 영어 못 해서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였다고 어정쩡하게 대답하게 된다.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이 대답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박사과정 학생으로서의 본업이고 시간을 더 투입하면 대부분 부족한 실력을 보완할 수 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나의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은 일상이나 대학원 생활에 아슬아슬하게 지장이 생기지 않는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듣기는 영화나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거나 세미나 때 빠르게 오가는 질문과 답변을 대부분 알아듣는 수준에는 절대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상 대화나 수업 등은 70~80% 이상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말하는 실력이 늘어나는 속도는 훨씬 더뎌서 박사과정 마지막 해에도 아마 영어가 모국어인 유치원생보다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유학 생활 6년 동안 영어 말하기 실력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웃기게도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기준은 확실히 세울 수 있었다. 영국에 있는 학교를 다녔지만 오히려 영국 사람은 학교에 별로 없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데도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준은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울 때 '저 사람 영어 잘한다'라고 느꼈던 지점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요즘은 좀 덜 한 듯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배울 때는 혀를 굴리는 미국식 영어 발음에 대한 환상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게 된다. 최대한 원어민과 가까운 발음을 낼 수 있도록 한국에서는 혀 수술까지 성행하고 있다는 뉴스가 해외 언론에 보도될 정도다. 이 기준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아무리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도 발음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어렵다.


막상 영어권에서 생활을 해 보니 발음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무리 발음 연습을 많이 했어도 원어민들은 그 사람의 모국어가 영어가 아님을 너무 자연스럽게 알아채게 된다. 아무리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 구사해도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외국인임을 쉽게 알아차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런데 원어민의 발음을 제대로 흉내내기 힘든 것이 과연 그렇게 큰 문제일까? 영어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외 국가에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때 사실상 세계 공용어가 된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출신 국가별로 영어 발음이나 악센트는 천차만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미국식 또는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영어는 그저 의사소통의 수단이므로 영어를 이용하여 의사 표현만 제대로 하면 되고 미국인이나 영국인들과 비슷한 발음을 한다고 해서 딱히 큰 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원어민 발음이 영어 실력의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은 유학생활 초기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그 생각에 쐐기를 박게 된 계기는 한 일본인 교수의 수업을 듣게 되면서부터다. 이 교수는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 1년 간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내가 수강하던 대학원 수업도 가르치고 있었다. 거시경제학 분야에서 대가로 인정받는 교수였는데 첫 수업 시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수업 내용을 짧은 문장으로 툭툭 끊어서 설명했다. 저 정도의 대가가 영어 실력이 기대만큼 좋지 않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놀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는 영어를 못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연구 실적이 있고, 표현이나 발음이 어눌해도 어찌 되었든 그 연구 결과를 다른 학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시켰다는 점은 그가 발음은 좋지 않더라도 의사소통 수단으로써의 영어는 아주 잘 구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교수의 영어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면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영어는 발음이 전부가 아니고 유창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이 해는 처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시기였다. 지난 글(영어로 학부생 가르치기)에서 언급한 대로 조교 생활을 시작한 첫 해에는 영어 전달 능력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저 깨달음을 얻은 뒤로는 영어 발음이나 유창성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수업 내용을 더욱 확실히 준비하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많으면 영어 실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설명을 잘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빠른 속도로 많은 말을 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 천천히 또박또박 핵심을 강조하면서 말하는 습관이 들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도 많다 보니 두 번째 해부터는 영어 전달 능력에 대한 평가가 크게 향상되기도 했다.


옛날 옛적의 사례지만 영어 발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rice(쌀)를 lice(이)처럼 발음해서 원어민이 못 알아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비록 이 두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더라도 '쌀'이나 '이'가 무엇인지를 원어민들에게 쉬운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발음의 문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발음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대충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영어 원어민들도 우리가 살짝 이상하게 발음을 한다고 해서 아예 말을 못 알아듣지는 않는다. (당신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얘기하는 원어민들은 당신이 영어를 못 한다고 대놓고 무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민과 같은 발음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쉬운 단어로 유창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말하고 싶은 내용이 정리되어 머릿속에 들어있으면 어눌한 영어로도 상당 부분 그 내용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대학원 과정을 하는 학생인 경우 영어 자체를 늘리려는 능력보다는 공부나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themissionchurchboston.com/improve-your-english-speaking-with-linkers-of-cau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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