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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Jun 08. 2021

축알못의 런던 축구 경험담

얼마 전 첼시가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런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면 왠지 유럽 축구 팬일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첼시의 우승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이 두 팀이 결승에 올라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이 과르디올라라는 사람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은 있지만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서도 첼시의 감독이 누군지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나는 축알못이다. 한때 회사 축구 동호회에서 잠시 뛰기는 했지만 동호회에서 축구했던 기억보다는 술 마신 기억이 더 생생하고, 국가대표 경기는 가끔 찾아보았지만 해외 축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런던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유럽 축구에 대한 관심이 극적으로 높아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영국에 있다 보니 굳이 경기를 챙겨보지 않아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간접적으로 접촉할 일이 많아졌다. 매일 오후 지하철 역 입구에 쌓여 있는 무료 신문인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London Evening Standard)에 손흥민 관련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리는 것을 자주 목격했고, 2년 가까이 매일 학교를 오가는 길에 아스날(Arsenal FC)의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Emirates Stadium)을 보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축알못인 내가 런던에서 경험했던 깨알 같은 축구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서울특별시와 개념이 비슷한 그레이터 런던(Greater London)은 런던 시티(City of London)와 32개의 자치구(borough)로 구성되어 있다. 그레이터 런던의 면적은 서울의 2.5배, 제주도의 85% 정도다. 서울에 비해 넓은 만큼 런던에 연고를 둔 축구팀이 생각보다 많은데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 자주 등장하는 팀만 꼽아 보아도 아스날, 토트넘(Tottenham), 첼시(Chelsea), 웨스트햄(Westham), 풀럼(Fullham), 퀸즈 파크 레인저스(Queens Park Rangers),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 등이 있다. 홈구장의 위치를 기준으로 아스날과 토트넘은 런던의 북동쪽에, 웨스트햄은 구단의 이름과는 달리 동쪽에, 첼시, 풀럼, 퀸즈 파크 레인저스는 서쪽에, 크리스털 팰리스는 남쪽에 위치해 있고 왓포드(Watford)는 그레이터 런던을 벗어나 북쪽에 자리 잡은 도시다. 참고로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가 주로 열리는 웸블리 경기장(Wembley Stadium)은 런던의 북서쪽에 있다.


이 많은 런던 연고 팀 중 본의 아니게 나의 런던 생활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팀은 바로 아스날이었다. 학교가 런던 지하철 홀본(Holborn) 역 근처에 있었는데 피카딜리 라인(Picadilly line)을 타고 동쪽으로 다섯 정거장만 가면 아스날 역에 도착하게 된다. 런던에 있었던 5년 8개월 중 약 4년 반 정도를 소위 북런던 지역에 살면서 통학 길에 피카딜리 라인을 이용했는데 항상 아스날 역이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근처를 지나쳤다. 그 탓에 평일 저녁에 아스날 경기가 있는 날에는 지하철이 인파로 가득 차 집에 가는 길이 험난해지기도 했다. 별명에 걸맞게 런던 지하철은 튜브(tube)처럼 생겼는데 튜브 양쪽에 있는 좌석 사이에는 사람 한 명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의 최대 수용 인원이 약 6만 명이므로 평일 저녁에 퇴근 인파와 관객들이 피카딜리 라인으로 한꺼번에 몰리게 되면 지하철의 혼잡도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몇 번 인파에 데고 나면서부터 아스날의 평일 홈경기 일정을 확인하여 경기가 있는 날에는 아예 일찍 집에 가기도 했다.


사실 아스날 팀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4년에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을 달성한 이후 국내에도 팬이 많아졌고 아르센 벵거가 오랫동안 감독을 맡았으며 과거 유명했던 선수로는 베르캄프, 앙리 등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까지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살았던 시절에는 가끔 경기장에 산책을 가기도 했는데 경기장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역대 레전드급 선수들의 사진과 설명이 붙어있는데도 머릿속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본격적인 지식이나 애정 없이 내적 친밀감만 키워가던 어느 날, 그래도 아스날 경기를 한 번은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방학 때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에미레이츠 컵(Emirates cup)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이 대회는 프리미어 리그 개막 직전에 해외에서 세 개 팀을 초청하여 전력을 점검하는 프리시즌(pre-season) 경기였다. 표 예매를 위해 표 값과는 별도로 회원 가입비까지 내야 하는 프리미어 리그 경기와는 달리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아서 주저 없이 표를 예매했다.


자리에서는 경기장이 꽤 가깝게 보였는데 독특한 헬멧을 쓴 골키퍼 체흐의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보일 정도였다. 대회는 이틀에 걸쳐 하루에 두 경기씩 총 네 경기가 진행되었다. 즉, 한 번 입장권을 구입하면 두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아스날 이외에 초청된 팀은 라이프치히, 세비야, 벤피카였다. 첫 경기는 라이프치히와 벤피카가 맞붙었고 두 번째 경기가 아스날과 세비야의 경기였다. 결과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아스날이 세비야에게 졌고 아스날에서는 그 해에 새로 영입된 라카제트(Lacazette)가 한 골을 넣었던 것 같다. 홈팀 아스날이 진 경기라 오히려 재미있었던 것은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그것밖에 못 하냐, 나가 죽어라'라는 식의 욕을 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답답하면 네가 직접 나가서 뛰든가'라고 대꾸하는 등 스포츠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대화가 영어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북런던 지역에 살긴 했지만 아스날의 북런던 더비 상대이자 손흥민이 뛰고 있는 토트넘의 경기를 볼 기회는 없어서 아쉬웠다. 새 경기장이 완공되기 전에는 웸블리 경기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집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었고,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이 새로 문을 열었을 때는 아이를 런던에 데리고 온 다음이라 축구 경기를 보러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런던에서는 유럽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자주 마주칠 수 있다 보니 유럽의 축구 문화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찾아보니 2018-19 시즌이었던 것 같은데 그 해 토트넘은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 4강 상대가 네덜란드의 아약스였는데 홈경기에서는 패하고 원정 경기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결승에 올라갔었다. 이 결과는 전부 나중에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고 당시에는 경기를 챙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던 어느 날 저녁 시간, 피카딜리 라인이 유난히 붐비고 있었다. 아스날 경기가 있는 날은 아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지하철에 겨우 올라타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탄 칸에서 키가 족히 1m 90cm가 넘어 보이는 네덜란드 사람 두세 명이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아약스 암스테르담'을 외치고 있었다. 피카딜리 라인의 서쪽 끝에는 히드로 공항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토트넘과 아약스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을 보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려서 바로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나를 포함한 다른 승객들에게도 함께 '아약스 암스테르담'을 외치자고 권했는데 거기에다 대고 차마 '나는 손흥민이 있는 토트넘을 응원하는데?'라고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들이 극성 훌리건까지는 아니었지만 '저기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난동을 부리는 훌리건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박사과정을 할 때 같은 연구실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선배와 독일에서 온 동기가 있었다. 연구실에 있는 학생들끼리 저녁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일정을 정할 때 이 사람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축구 경기 일정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중에 물어보니 제노바 출신의 이탈리아 선배는 삼프도리아를, 서부 독일 출신의 동기는 묀헨글라드바흐라는 팀을 응원한다고 했다. 이들은 출신 지역 팀 경기는 기본적으로 챙겨보면서 다른 리그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뽐냈는데 유럽인들에게 축구는 정말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MRes 과정을 시작한 2015년에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뛰기 시작했기 때문에 왠지 런던 생활을 같이 한 기분이다.(물론 그는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워낙 활약상이 뛰어났기 때문에 같은 연구실에 있던 동료들도 모두 손흥민을 알고 있었고 가끔 훌륭한 대화 주제가 되기도 했다. 내가 분명 동료들에게 군 생활을 2년 동안 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손흥민이 군 문제 해결을 위해 2018년 아시안게임에 차출되자 정말 한국인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가야 되느냐고 물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는 있지만 최소한 유럽 남자들에게 축구는 생활에 이미 녹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football.london/arsenal-fc/news/richarlison-emirates-stadium-brazil-arsenal-154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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