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서울 아파트 가격이 어마 무시하게 올랐다. 웬만한 근로자의 월급을 모아서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15년 이상 한 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야 할 정도다.(링크) 그런데 이렇게 서울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아직도 런던의 집값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런던은 전 세계에서 자금이 몰려들어 꾸준히 집값이 오른 탓에 주택 가격이 높다는 악명이 자자하다. 이를 반영하듯이 집세도 한국에서 접해왔던 월세 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런던에서 살았던 집(또는 기숙사 방)은 총 다섯 군데였다. 기숙사 방 세 곳에서 총 2년 가까이 혼자 살았고 3년 8개월 동안 소위 One bedroom flat(침실 1개와 거실, 주방, 욕실로 구성된 집) 두 곳에서 가족들과 지냈다. 대충 계산해 봐도 6년 약간 안 되는 기간 동안 냈던 집세가 1억을 훌쩍 넘는다. 그렇게 비싼 월세를 내고 살았던 집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적어보려 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혼자 살았던 기숙사 방 중 두 곳을 간단히 소개한다.
석사 때 1년 동안은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작은 방 안에 침대, 책상, 옷장, 욕실 겸 화장실이 있는 구조였다. 참고로, 방 안에 욕실 겸 화장실이 있는 이런 구조를 en suite라고 부른다. 8개 방이 하나의 flat이 되어 주방과 식당을 공유하였다. 이 방의 월세는 주당 160파운드 정도였다. 그 당시 파운드 환율이 1,800원 정도였기 때문에 방세가 한 달에 100만 원을 가뿐히 넘는 셈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기숙사가 학교 기숙사 중에 그나마 월세가 싼 편이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고 주변 지역이 치안이 불안정하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늦게까지도 꽤 자리가 남아 있었다. 학교까지는 40~45분 정도 걸어야 하지만 버스를 타도 30분은 걸리는 애매한 위치였다. 런던의 중심부인 Zone 1에 있었고 템스 강 남쪽이었으며 Elephant & Castle 역에서 가까웠다. 참고로 Elephant & Castle 역은 지역 이름은 환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런던에서는 치안이 좋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지하도에만 안 내려가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운동도 할 겸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학교까지 주로 걸어 다녔다. 가는 경로에 따라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타워 브리지(Tower Bridge)를 보게 되거나 린던 아이(London Eye)와 빅 벤(Big Ben)이 보여서 눈호강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 달 정도 되니 무덤덤해졌다. 근처에 LidL이라는 저가 할인마트가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Tesco 대형 매장이 있어서 장 보기에 편리했다. 아주 안전한 지역은 아닌 것 같았지만 학교로부터의 거리나 물가 등을 고려할 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석사 1년을 마치고 한국에서 결혼을 한 후 아내와 런던에 함께 와서 살기 시작했다. 어렵게 구한 집에서 1년 반 정도 살고 있었는데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집을 관리하는 부동산 회사에 아기를 키울 수 있냐고 문의했더니 안 된다는 답을 받았다. 아이가 있다고 차별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소송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지만 그 집이 그렇게까지 해서 계속 살고 싶을 정도로 좋지도 않았고, 영국의 사법 제도가 한국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 부부의 손을 들어줄 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계약기간을 약간 빨리 종료하는 선에서 타협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내는 한국에 돌아가서 출산을 하고 1년 정도 처가에서 지내다가 영국으로 같이 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한 후 가족들이 오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나 혼자 살 곳을 빠르게 찾아야 했다. 그런데 늦게서야 방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바람에 학교 기숙사 등 다른 곳은 전부 접수가 끝난 상황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사설 기숙사 한 곳을 찾아냈고 위치와 집세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지원을 했는데 바로 다음 날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돌이켜보면 이때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봤어야 했다.) 이곳의 위치는 Zone 3의 Wood Green 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였는데, 학교에서 거리는 멀었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갈아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까지 3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런던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집세가 낮아지는 반면 지하철 정기권 가격은 올라가는데,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주당 150파운드라는 집세는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막상 들어가서 살기 시작하니 단점이 너무 뚜렷했다. 무려 11명의 다른 학생들과 주방과 욕실 및 화장실을 공유해야 했다. 12명이 쓰는 flat인데 주방은 예전 기숙사의 절반 크기도 안 되었고 욕실과 화장실은 각각 두 개씩밖에 없었다. 또한 예전 기숙사에는 대학원생들만 살았지만 이곳에서는 학부생들이 대다수여서 주말마다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마침 논문 작업과 조교 업무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혼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평일에는 보통 저녁 8시가 넘어서 들어왔고 토요일에나 하루 종일 쉬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방학 때마다 가족들을 보러 한국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기숙사에서 지냈던 기간은 6개월 정도였다. 두 번째 방학이 끝나가던 4월 말에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을 데려와서 같이 살 집을 구할 수 있었는데 5월 중순에 시험이 끝나자마자 남은 6주 동안의 기숙사 방세를 고스란히 포기하고 이 집으로 바로 이사를 했다. 여러 가지 상황상 어쩔 수 없이 버틴 곳이었는데, 나이가 들면 돈을 조금 더 내더라도 최소한의 독립성은 보장된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 곳이기도 하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lse.ac.uk/student-life/accommodation/halls/sidney-webb-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