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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Sep 01. 2021

런던에 있던 작은 나의 집 3

보통 몸은 편하지만 연구주제가 잡히지 않아 정신적으로는 괴로운 박사과정 1년 차에 나는 다른 걱정거리까지 껴안고 살고 있었다. 학기 시작 직전에 아들이 태어났고 첫 1년 정도는 아내와 아이가 처가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그 이후에는 런던으로 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같이 살 집을 미리 구해놓아야 했다. 이전에 살았던 집에서 아이가 생겼다고 재계약을 거부당한 경험이 있어서 어떻게 집을 구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예전에 회사에서 같이 유학 나온 동료들로부터 가족이 있는 학생들에게 기숙사를 제공하는 몇몇 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화로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데 기숙사 시설이 좋지 않아서 생활하기에 편하지는 않다는 평이었다. 아내가 출산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기 이전에 그 재단의 웹사이트를 보면서 어떤 곳이 좋을지 의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이 우리가 원하는 시기에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당시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봄 방학 때 한국에 다녀오고 나니 4월 중순이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집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대기가 얼마나 길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 위 재단에 입주 신청을 했다. 신청이 접수된 후부터 입주 가능한 플랏의 목록이 메일로 왔는데 운 좋게도 아내와 내가 괜찮게 보았던 그 플랏이 목록에 있었다. 전화를 해서 뷰잉 약속을 잡고, 집을 보고, 오퍼를 넣고, 입주가 확정되기까지 이틀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입주 일자를 조율하여 5월 중순에 연말 시험이 끝나자마자 이사를 했다.

  


이 집도 원베드룸 플랏이었다. 겉은 전형적인 런던의 집 모양이었는데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내 전체가 하얀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었고 집에 갖추어져 있는 가구나 주방기기도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침실도 넓고 화장실도 큰 대신 주방은 좀 작은 편이었다. 열두 명이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삶을 살다가 이곳에 들어왔더니 혼자만의 공간도 너무 넓고 통화할 때는 집 안에서 소리가 울리기까지 하길래 집을 넓혀가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와 아이가 한국에서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 집의 단점이 서서히 드러났다. 처음에는 침실에 싱글 매트리스를 추가로 깔고 세 식구가 모여 잤는데 언제부턴가 옆집에서 나는 온갖 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침실과 벽을 공유하고 있는 옆집이 그동안 비어 있다가 새 학기에 맞춰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왔는데, 그 집과 우리 집 침실 사이의 벽에 금이 가 있어서 거의 여과 없이 모든 생활 소음이 전달되는 것이었다. 만약 옆집에 입주한 학생이 영어권 국가 출신이 아니었다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차라리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는 미국 사람이었고, 왜 이럴 때만 영어 듣기 능력이 기적같이 상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학생이 혼자 게임하거나 TV 보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주말에 가끔씩은 여성을 데려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소리가 생중계되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침실은 거의 아이와의 놀이 공간으로만 사용하고 거실이 실질적인 침실의 역할을 했다.


생후 10개월에 런던에 온 아이는 신생아 때부터 울음소리가 우렁찬 편이었는데 이 집에 있었던 초반 1년 정도는 밤에 잠들기 전에 또는 자다가 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옆집의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상황이었고 런던에 도착한 첫날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를 겪고 나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다른 집에 피해를 미칠까 봐 아내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이 1층(우리나라로 치면 2층)에 있었는데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곧 뛰기까지 하는 시기가 되니 아래층에 소리가 덜 울리도록 방바닥을 매트로 도배할 수밖에 없었다. 첫 몇 개월 동안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사까지 고려했지만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그냥 눌러앉아 살기로 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점도 많이 있었다. 집세 이외에 전기, 수도, 인터넷 등의 부가요금을 전혀 부담할 필요가 없었고, 형식적으로 1년씩 계약을 하지만 4주 노티스만 주면 위약금 없이 언제든지 집에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재단 직원이 건물 관리를 하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메일을 보내면 웬만큼 해결이 되었다. 이 집을 떠나기 두세 달 전에는 전반적으로 금이 가 있던 침실 벽도 수리를 해서 마지막에는 옆집의 소음이 상당히 줄어들기도 했다. 월세는 첫 해는 1,356파운드, 둘째 해는 1,403파운드였는데 위치를 고려하면 싼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치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학교까지 피카딜리 라인으로 연결되는 칼레도니안 로드(Caledonian

Road) 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집에서 칼레도니안 로드 역까지 걷다 보면 철길 건너편으로 아스날의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Emirates Stadium)이 멀리 보이곤 했다. 통학시간은 35분 정도 걸렸는데 55분 거리였던 첫 신혼집에 비하면 꽤 학교에서 가까워졌다. 노던 라인(Northern Line)의 터프넬 파크(Tufnell Park) 역이 걸어서 15분 정도로 더 가깝긴 했는데 학교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갈아타야 해서 이 역을 많이 이용하지는 않았다.


지하철을 타지 않더라도 버스를 타면 시내까지 20~3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7~8분쯤 걸어 나와서 29번 버스를 타고 캠든 타운(Camden Town)을 거쳐서 토트넘 코트 로드(Tottenham Court Road),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등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이를 시내 중심부에 있는 박물관에 데려갈 때나 캠든 타운에 있는 작은 한인마트를 이용할 때 주로 이 버스를 탔다.


쇼핑은 주로 홀로웨이 로드(Holloway Road)까지 걸어 나가서 했다. 홀로웨이 로드에는 작은 백화점부터 모리슨(Morrisons), 웨이트로즈(Waitrose) 등 대형 슈퍼마켓, 각종 체인점과 음식점이 대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고 작지만 재래시장도 있었다. 이곳까지는 집에서 걸어서 15분가량 걸렸지만 필요한 가게는 웬만하면 찾아볼 수 있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집 주변에는 달메니 공원(Dalmeny Park)이라는 작은 숲 속 공원이 있어 아이와 함께 놀기에 좋았다. 좀 더 걸어 나가면 근처 지하철 역의 이름이기도 한 터프넬 공원(Tufnell Park)이 넓은 잔디밭과 함께 펼쳐져 있었다. 놀이터에 있는 놀이기구가 달메니 공원보다 많고 넓은 잔디밭에서 아이가 뛰기 좋아서 이곳에도 많이 데려갔다. 다른 쪽으로 15~20분 정도 걸어가면 휘팅턴 공원(Whittington Park)도 있었는데 여기는 체육시설이 잘 되어 있고 넓어서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대도시 한가운데였지만 집 근처에 공원이 많이 있어 아이를 데려가서 자연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하기에는 괜찮았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87309518@N06/82889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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