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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Jul 15. 2021

복장 터지는 영국의 행정 서비스

최근 해외에서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이 블로그 등을 통해 경험담을 공유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우리나라의 행정 서비스가 다른 국가에 비해 전반적으로 빠르고 괜찮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 영국에 6년 가까이 살아 보니 영국에서는 내가 원하던 서비스가 빠른 속도로, 한 번에 처리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라면 여러 번 경험했을, 느려 터지고 한숨 나오는 행정 서비스 관련 일화를 몇 개 적어볼까 한다. 



영국에 처음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은행 계좌 개설은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었지만 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서류를 한 장 발급받은 후 은행 직원과의 상담을 통해 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상담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생각보다 간단하네'라고 설레발을 치고 있었는데, 상담을 시작한 지 5분도 안 되어 은행 직원이 서류의 주소를 가리키며 계좌 개설을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주소는 모 기숙사의 Flat (대략 아파트의 동, 호수 개념이다.) 705-2였는데 내가 주소를 입력할 때 '705-2, 모 기숙사'라고 입력을 한 것이다. 그 직원은 주소는 숫자로 시작하면 안 되고 'Flat 705-2'로 시작해야 한다며 서류를 다시 발급받은 후 약속을 다시 잡으라고 했다. 결국 계좌 개설까지는 시간이 1주일 정도 더 걸렸지만, 그래도 이 경우는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는 것이라고 좋게 생각해 줄 여지는 있었다. 비록 그 규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나만 몰랐는지, 그 직원 본인만의 자의적인 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1년 여가 지난 후 결혼을 하고 아내가 런던으로 함께 왔다. 아내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은행 계좌가 필요했는데 내 아내는 학생의 부양가족 자격으로 비자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거주지 증명서가 있어야만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거주지 증명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구청에 주민등록을 한 후 주민세(council tax) 고지서를 본인 명의로 발급받는 것이었다. 하루 날을 잡아 주민등록을 위해 서류를 갖추고 구청에 갔는데 무려 네 시간을 기다려서야 서류를 접수할 수 있었다. 2~3주 후 드디어 주민세 고지서가 날아왔는데 영어로 딱 네 글자인 내 아내의 성(姓, surname)이 틀리게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끔찍한 대기시간을 견딜 생각이 없었기에 메일을 보냈더니 2~3주 후에 메일이 접수되었다는 답장이 왔고 그로부터 다시 2~3주 후에 드디어 이름이 제대로 인쇄된 고지서가 도착했다. 주민등록 절차가 완료되는 데 무려 두 달가량이 걸린 셈이다.


학교에서 학생 자격으로 경험한 행정 서비스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조교나 코스 매니저를 하면서 과 행정직원들과 업무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채점 결과가 들어 있는 엑셀 파일의 수식은 원칙적으로 행정 직원들만 고칠 수 있었는데 이들이 수식을 잘못 입력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보니, 나중에는 패스워드를 요청하여 내가 직접 수정을 하는 것이 더 편했다. 또한 석사 과목을 가르치는 대학원생들은 계약서 상으로 학부과목 시험 채점을 추가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에게 채점 일정, 과목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아 채점 일정이 완전히 꼬이게 되는 일도 흔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저 사람들이 진정한 월급 루팡이구나'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작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드디어 영국의 답답한 서비스와는 안녕이라고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소소한 영향을 받고 있다. 작년 4월 말에 한국으로 들어올 때 추가로 들어올 돈이 있어서 영국 은행 계좌를 닫지 않았다. 8월에 인터넷 뱅킹으로 기숙사 보증금, 조교 월급 등이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한국 계좌로 송금을 했다. 10월 정도에 같이 유학했던 동기로부터 영국 계좌를 조회해보니 잊고 있었던 돈이 입금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계좌를 조회해 봤더니, 소액의 이자와 함께 생각하지 못했던 돈이 입금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파운드 환율이 낮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송금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2월쯤에 다시 인터넷 뱅킹 접속을 시도하였더니 비밀번호가 유출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모바일뱅킹 앱은 이미 지워버린 지 오래라 비밀번호 복구가 어려워 국제전화를 걸어 방법을 문의하니 새 비밀번호를 영국에 있는 주소를 이용해서 우편으로 받거나, 이 사정을 편지로 써서 은행 사서함 주소로 보내라고 했다. 결국 편지를 쓰긴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영국으로 일반 우편은 보낼 수 없고 소포만 갈 수 있는데, 은행 주소는 사서함이라 소포를 보낼 수가 없어서 편지마저 다시 돌아왔다. 결국 꼼짝없이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IT 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비밀번호를 우편으로 받아야 하고, 은행은 전화 아니면 우편 사서함으로만 연락할 수 있다니 내가 도대체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덜 열심히 일함에 따라 전반적인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는 대신 이를 서로 이해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삶이 더 편해질 수도 있겠다.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가 느낀 바로는 '합의'라기보다 '체념'에 더 가깝긴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또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서울대학교 장용성 교수가 한 인터뷰(링크)에서 미국에서는 생산성이 높은 사람은 말단에 남겨두지 않고 모두 승진시키기 때문에 말단 직원들의 서비스가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 학연, 지연 등을 통해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선진국이라고 해서 정말 생산성이 높은 사람을 '모두' 승진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가설의 취지에는 공감한다. 이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동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꼭 한 번 연구해보고 싶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newstatesman.com/politics/staggers/2018/02/both-sides-labour-hear-what-they-want-haringey-we-need-new-way-d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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