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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Mar 14. 2022

책임감에 대하여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초등학교(사실 내가 졸업할 때는 국민학교였다.) 때까지는 나도 권력욕이란 게 있었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반장 자리도 당연히 가져야 된다고 철없이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반장 선거에 꾸준히 나갔었다. 그러나 반장에 당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상 인기투표나 마찬가지였던 선거에서 겸손하지도 않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별로 없었던 내가 당선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 사실을 조금은 깨달았는지 이후에는 선거 출마를 자제하고 서기 역할에 만족했다.(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학급일지, 학급 회의록 등을 손으로 기록하는 서기라는 직책이 반마다 있었다. 이번 글에서 본의 아니게 여러 번 연식을 인증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반장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아마도 순수한 명예욕에 가까웠을 것이다. 학생을 권리를 가진 주체로 인정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반장이 되어도 권한이 거의 없었고 책임도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반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반장 선거에 출마할 때 주된 고려사항이 전혀 아니었다. 반장의 책임감은 반 전체가 떠들어 대는 상황에 분노한 교사들이 '반장, 이리 나와!'라고 소리를 지른 후 반장에게 먼저 체벌을 가하기 시작할 때나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문득 어렸을 때의 반장 선거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이번 대선의 개표방송을 지켜보면서였다. 승부를 떠나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후보들의 득표수였다. 득표수가 700만, 800만, 900만 등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대선 후보들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새삼 궁금해졌다.


만약 내 이름이 저 화면에 있고 이름 옆 득표수가 100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면,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휘말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내가 잘났기 때문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통령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구나.'라는 자뻑도 마음 한 구석에 있겠지만, '감사하게도 천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내가 대통령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엄청난 규모의 책임감이 나를 압박해 왔을 것 같다.


대선 후보들은 분명 나처럼 새가슴은 아닐 테니 개표방송을 보면서도 본인을 잘 추슬렀을 것이다. 무려 16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각각의 후보에게 표를 던진 상황에서 아마도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겠지만, 단지 당선된 후보든 낙선된 후보든 간에 이번 선거를 어렸을 때 했던 반장 선거 정도로 생각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자뻑보다는 책임감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기를, 그리고 그 책임감을 앞으로의 정치 인생에서 계속해서 떠올리기를 바란다. 물론 이렇게 당연한(!) 요구를 하는 만큼 나도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20310000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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