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는 이유가 있다
다섯 살을 향해 달려가는 코코. 이제 더 이상 천방지축 개린이가 아니다. 소파를 터트리거나 옷을 찢는 등의 사고도 안친다. 안된다고 하면 알아들을 줄도 안다. 기특하면서도 나이가 들어가는 코코를 보면 사고뭉치적 개린이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코코는 봄날이다.
코코는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장소나 물건에 대한 취향도 생겼다. 산책을 나가면 꼭 들리는 벤치가 있다. 코코는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일광욕을 즐긴다. 내가 가자고 안 하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벤치에 머무른다.
11월 초까지만 해도 벤치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던 코코는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더 이상 일광욕을 즐기지 않는다. 지나는 길에 벤치가 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냄새를 맡을 뿐이다. 일광욕을 좋지만 추운 건 싫은 모양이다. 밖은 추우니 집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해가 잘 드는 위치를 찾아다니며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땐 이사하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든다. 전에 살던 집은 해가 잘 안 드는 동향이었다. 오전에 잠깐 해가 비추다 말았다. 지금 집은 해가 아주 잘 드는 남서향이다.
코코는 무릎 멍이다. 무릎에 앉는 걸 좋아한다. 내가 소파에 앉으면 어디선가 코코가 나타난다. 평소에는 작은방이나 자기 집에 들어가 쉬다가도 소파에 앉기만 하면 어떻게 알고 나타난다.
어릴 때는 곁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던 코코였다. 껌딱지 마냥 졸졸 따라다녔다. 이제는 으른이라고 혼자 쉴 줄도 안다. 그러나 무릎에 앉는 건 포기할 수 없나 보다. 소파 위로 깡총 뛰어올라 무릎으로 파고든다.
다리가 저릿저릿 해지도록 앉아있을 때도 많다. 그런데 내려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귀여워서 그냥 둔다. 할 일이 있거나 다리 저림에 어찌할 방도가 없을 때까지 코코는 무릎 멍 시간을 보낸다. 무릎이 얼마나 편한지 배를 보이고 잠을 자기도 한다.
코코는 내 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걸 좋아한다. 공간도 넉넉한데 굳이 자기 엉덩이를 내 몸에 찰싹 붙이고 앉는다. 개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건 그만큼 주인을 믿는다는 거다. 개는 신뢰관계가 없으면 등을 보이지 않는다.
코코는 내 옷을 좋아한다. 특히 두꺼운 패딩을 아주 좋아한다. 외출 준비를 하며 꺼내 둔 패딩에 코코가 자리를 잡는 건 일상다반사다. 이제는 뭐 그러려니 한다.
그렇지만 옷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 옷 내가 입어야 된다고, 비켜달라고 하면 순순히 비켜준다. 패딩의 푹신함이 좋은 건지, 체취가 좋은 건지 둘 다인 건지.
코코에게 사랑을 주면서 키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사랑을 받으며 코코를 키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산책 중 벤치에 일광욕을 즐기는 것도, 무릎 멍인 것도, 내 패딩에 몸을 비비며 자리를 잡는 것도 내 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것 모두 코코의 사랑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