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러시아-여덟시간의 차이

-상트페테르부르크

by 호빵씨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걸리는 시간은 8시간.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걸리는 시간이 ktx로 2시간 40분인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먼 거리지만 러시아에서 8시간 기차는 그 체감이 달랐다.

오, 뭐라고?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8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잠만 자고 일어나면 도착하겠는데. 정말 가까운 걸!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ktx 한시간 거리의 서울도 멀다고 가지 않을 거다. 항상 그렇듯이 실생활에 와 닿는 시간과 거리는, 절대적 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고 심리적인 거니 말이다.


어디나 대도시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다 그렇겠지만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는 길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밖 풍경과 비슷했다. 혹시나 디지털 단지가 보이려나 싶어 창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풍경이다. 물론, 보일리 없지만.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간다.


어쩐지 조금 싸늘한 열차에 라이너를 깔고 자다깨다 하다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도착한 새벽의 역에서는 세상에, 영어 방송이 나온다. 겨우 여덟시간 차이인데 러시아 기차역에서 영어 방송을 들을 줄이야.


비록 내가 아무 생각없이 다니는 것 같아도 도시의 출도착 시간 정도는 따지는 편이다. 어떻게 하면 숙박료를 최소한으로 하며 체류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는 출도착 시간에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행에서 효율을 따지다보면 미묘하게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마치 이번처럼. 비용과 시간을 고려한 효율을 강조하다 보니 밤 열시에 출발해 새벽 여섯시에 도착했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러시아에서 여섯시는 아주 깜깜한 새벽녘.

새벽길을 걷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언제 뜰지 모르는 해를 기다리며 역에서 대기하는 것과, 그래도 걸으면 5분 정도면 도착해 24시간 체크인이 가능한 숙소에 들어가는 것 사이에서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냥 그대로 걸으면 될 뿐이었다. 깜깜한 새벽의 거리엔 사람 그림자가 나타날 때마다 쭈뼛 놀랐지만 그래도 헤매지 않고 숙소까지 무사히 찾아 들어갔다.



모스크바에서 너무 불친절한 사람들을 봐서였던가. 24시간 체크인이 된다는 정보를 몇 번씩 확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하며 걸어갔는데 이 호스텔 직원은 그 모든 불안이 한 번에 씻겨내려가도록 정말 천사처럼 친절하다. 심지어 자다 깨서 체크인을 받았는데도 엄청나게 친절하다. 지도를 챙겨주고 비록 돌처럼 딱딱한 와플을 구워주었지만 아침도 먹으라며 부엌으로 데려갔다. 이런 친절을 받아본 일이 꽤 오래전인 듯싶어 정말이지 감동스러울 정도로 고마웠다.

침대를 배정받고 잠시 모자란 잠을 보충한 뒤에 지도를 펴들고 산책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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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여덟시간 거리지만 이곳은 뭔가 다르다. ‘유럽을 향한 대문’이라든지, ‘가장 유럽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든지 하는 수식어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진짜 모든 것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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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동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회색의 하늘만 구경하다 오랜만에 본 파란하늘도 새롭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봐도 웃으면서 대답해주는 것도(그것도 영어로) 새로우며 그래선지 번화한 넵스키대로도 활기로 가득찬 느낌이다. 마치 우울한 기분에 오래 갇혀있다 화려하고 유쾌한 친구를 만나 아무 생각없이 웃고 떠들며 노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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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떠날 표를 사러 핀란드역에 들러(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기차역이 6개가 있는데 각각 역은 목적지 이름이 붙어있다. 새벽에 내린 역은 모스크바가 목적지니 모스크바역, 표 사러 가는 곳은 핀란드가 목적지니 핀란드역) 표 구입까지 마치고 나자 오늘 할 일은 다 했다 싶다. 이제 산책을 하며 이 도시를 즐겨볼 시간이다.

걷다보니 지도상엔 여름정원이 근처에 있어 먼저 그 쪽을 향했다. 아침에 잠깐 봤던 호스텔의 론리플래닛에는 이 공원을 가리켜 ‘가장 사랑스러운 공원’이라고 평가해두기도 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내게 무엇을 주든 이미 모든 것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스러운 공원이라니까 하며 그쪽으로 갔다. 매표소 같은 부스가 있어 가격을 물어봤더니 무료입장이란다. 신나서 안에 들어갔는데 엄청나게 멋지다. 러시아의 모든 것의 규모가 그렇듯이 이 공원도 참 크다. 거인의 집 정원에 잠시 잘못 들어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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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는 큰 나무가 빽빽이 들어 서있고 조각품이 곳곳에 늘어서 있다. 잘 가꿔진 뜰에 가만히 앉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내 키보다 높게 올라간 나무들이 주변의 소음을 차단해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싶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추가로 멋진 사실은 공원 내 와이파이 무료에 화장실 무료라는 것. 화장실에 뜨거운 물도 정말 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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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앉아있다 몸이 점점 추워와 다시 길을 나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공원

출입문을 나서며 전적으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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