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러시아-걷는 것의 즐거움

-상트페테르부르크

by 호빵씨

낯선 길에 갈 땐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만큼만 움직여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자동차의 속도로, 자전거의 속도로 빠르게 이동하다보면 풍경은 잔상으로만 남기 마련이다. 거기에 낯모르는 길을 찾거나 물어 버스같은 것을 타고,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긴장한 상태로 미어캣마냥 길을 살피며 가다보면 곧,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재미있어?


그러다보니 한 도시에 도착하면 웬만한 길은 그냥 걷는 편이다. 길을 잃어도 지도를 찾아 걸어 돌아갈 수 있을 정도만 잃고, 내가 머릿속에 풍경을 저장할 수 있는 속도를 유지한다. 그렇게 천천히 걸었던 길은 오랫동안 기억에 저장돼 몇 년이 지나도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곤 한다. 나는 길을 걸으며 장소를 사랑하게 되는 타입의 사람.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도보여행이지만 오히려 내겐 더 효율적인 여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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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는 정말 많이 걸었다. 공원이며, 피터폴요새며, 에르미따주며 하는 낯선 이름의 곳들을. 물론 이 모든 곳들이 넵스키대로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하게 몰려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긴 하다.

이제 키릴문자의 일부를 읽을 수 있어 듬성듬성 자음과 모음이 빠진채로 간판을 읽고, 러시아어 실력은 하나도 늘지 않았지만 눈치와 바디랭귀지로 뭘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모스크바만큼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사랑스러운 도시다. 앞으로 이동할 곳이 더 많았지만 이제는 며칠씩 기차로 이동할 일도 없다. 마음을 놓고 쉬어도 될 듯이 평화롭다보니 기분이 좋아 걷는 것도 신났다.


어느 날은 유람선을 탔다. 피터폴 요새를 구경갔다 나오는 길이었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 티켓파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네바강부터 시작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혈관처럼 퍼져있는 작은 운하를 거쳐 겨울궁전 앞에 세워준다는 말에 탔다. 그러나 요새를 돌 때쯤엔 이미 날이 흐려지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관광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비오는 날은 실내, 맑은 날은 실외라는 간단하고도 유용한 관광원칙을 무시하고 다니던 때라 좋다며 유람선을 탔다.당연히 참, 추웠다.

처음에는 밖에 앉아 모든 것을 다 구경하겠다며 갑판에서 내리는 비와 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하지만곧 드는 생각은 풍경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이 배에서 내리는 즉시 장갑과 모자를 사야겠다는 것? 결국 쇼핑을 다짐하다 배 안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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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은 한시간 가량 네바강과 운하를 돌며 운하와 주변 건물에 대한 엄청나게 빠른 러시아어 설명을 들으며 도는 건데 배 안은 따뜻하고, 운하를 구불구불 돌아 배는 달리고, 설명은 주문처럼 들리고, 나는 좀 전까지 추위에 떨고 있었고, 해서 나중엔 좀 졸았다.



또 어느 날엔 에르미따주에, 이삭성당에 갔다. 모스크바에서도 느꼈지만 러시아는 그림도 화려하고, 옷도 화려하고, 집안 장식도 화려하고, 정말 시종일관 화려하다. 그리고 모든 건물의 천장이 정말 높고 대리석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17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세 번에 걸쳐 지어졌다는 이삭성당은 크고 높은 건물이 계단도 층도 없이 하나로 뚫려 모든 벽면과 천장에 성화와 프레스코화가 가득했다.서유럽에서 봤던 프레스코화는 파스텔톤에 가까운 색이 거의 대부분이라 프레스코화는 원래 밝은 색깔만 낼 수 있는 건가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색 자체가 진하고 어둡다. 여기도 대리석 저기도 대리석 참 흔하게 대리석을 사용했다. 그 대리석이 빛을 받으면 얼마나 예쁘게 빛나는지 감탄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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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성당 전망대라는 이삭성당의 전망대는 명성에 걸맞게 엄청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등에 땀이 배고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하고, 평온히 잘 올라가는 듯 싶던 서양인들이 숨을 헐떡이기 시작하고도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자 전망대가 나왔다. 한발 한발 걸어올라간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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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발레도 보러 갔었고, 피터폴 요새를 가기도 했었지만 역시 가장 좋았던 건 넵스키대로를 걷는 일이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걷다 심심해지면 옆 골목으로 들어가 시장이며, 슈퍼마켓이며 작은 기념품 가게같은 것을 구경했고 또 다시 큰길로 돌아와 걷다 길가에 있는 까잔 성당같은 곳을 구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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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밥을 먹자마자 숙소를 나와 하루종일 걷다 완전히 녹초가 돼 돌아가면 저녁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제 깜깜해지겠네 돌아가야지 마음을 먹고 무거운 발을 옮기다보면 넵스키대로는 하나하나 건물에 불을 밝혔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정말 좋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밤. 박물관을 나와보니 이미 밤이 찾아와 있었다. 그동안 무리해서인지 모스크바 가는 열차에서 다쳤던 오른발목이 다시 붓고 아프기 시작했으며, 습기 탓인지 몸은 감기라도 걸린 듯 노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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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러시아도 마지막 밤. 전날처럼 전전날처럼 넵스키태로는 불을 환하게 켜고 있었다. 숙소까지 긴 길을 걸어오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한국어로 중얼거려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꽤 좋았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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