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헬싱키
러시아의 왼쪽 끝에 위치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러모로 유럽으로의 대문 같은 곳이다. 기차를 타면 바로 핀란드, 발트3국, 벨라루스 등으로 갈 수 있고, 버스를 타면 에스토니아 등 동유럽으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선택지가 많다는 건 그만큼 고민의 여지가 많은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탈린으로 갈 것인지, 헬싱키로 갈 것인지 계속 고민 해왔지만 결정은 의외로 쉬웠다. 나는 물가가 싸고, 옛모습을 가지고 있고, 호젓하고 예쁜 동유럽보다 자작나무와 디자인의 나라를 택했다.
가는 길의 차창엔 전나무 숲과 자작나무 숲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횡단열차를 탔을 때도 질리도록 본 풍경이었지만 기분은 그때와 왠지 모르게 달랐다. 이제 핀란드에 도착하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 눈 앞으로 펼쳐지겠지. 그곳의 사람들은 아마도 친절하겠지. 아마도 핀란드는 여유가 넘치고 안전할 거야.
아마도 사람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 그곳에 대한 기대감과 인상으로, 지난 장소의 느낌을 마무리짓는 모양이다. 러시아에서도 친절한 사람은 만났고, 비둘기와 기차 계단의 위협말고는 한 번도 위험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핀란드에 대한 기대감으로 러시아를 위험했던 나라로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었다.
열차 안으로 제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돌아다니며 여권을 검사하고 도장을 찍었다. 내 여권을 받아들고 한참을 살핀 후에 러시아 비자 위로 도장을 찍었다. 기차모양의 스탬프가 그 위에 찍혔다.
이제 기차 타고 나는 헬싱키로 간다.
헬싱키 가는 기차 안에서 러시아 사람이 전화통화를 하는 걸 듣고 있는데 간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왔다. 한달가까이, 기차에서 미니버스에서 사람들이 대화하는 걸 듣거나, 내게 거는 말로 아주 조금 익힌 러시아어들이다.
‘하라쇼(좋아)’, ‘니엣(그래)’, ‘다(아니)’, ‘네즈나유(몰라)’ 같은 아주 간단한 말들.
이제 한동안 그런 말을 듣고 할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머릿속에서 그동안 외웠던 키릴문자와 인사말, 숫자들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3시간 20분만에 헬싱키에 도착했다.
가는 길은 예상처럼 참 예뻤다. 내가 생각한 핀란드는 디자인의 나라, 카모메식당의 배경, 자작나무 숲 같은 것들이다. 디자인의 나라답게 구석구석이 예쁘다. 예를 들면 역 표지판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이제는 안전하고 친절하고 예쁘지만 물가는 더럽게 비싼 북유럽의 시작이다.
핀란드부터는 계획도 지도도 뭣도 아무 것도 없어 일단은 역 인포메이션센터를 찾아갔다. 지도를 받아들고 며칠전 예약한 호스텔에 가는 방법을 물어 일단은 숙소로 갔다.
그동안 러시아의 호스텔이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해서 도미토리로 만든 것 같았다면 여기는 원래부터 호스텔 목적으로 지어진 것처럼 구조가 다르다. 널찍하고 크고 샤워시설이나 부엌같은 시설도 여행객들에게 맞춰져 만들어져있다. 또 모든 쓰레기를 한 쓰레기통에 버리던 러시아와 달리 여기는 분리수거통도 많다.
그러나 너무 커서인지 사무적인 느낌이고 호스텔의 여행객들 역시 제각기 자기 할 일만 한다. 게다가 싼숙소(정말 호스텔 이름이 cheap sleep hostel이었음)라는 이름에 걸맞게 헬싱키에서는 거의 최저가에 가까운 숙소였지만 러시아의 가장 비싼 숙소보다도 훨씬 비싸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나니 약간 애매한 시간이다. 헬싱키의 약간 외각에 있는 이 숙소에서 나가기는 조금 늦은 시간인 듯 싶고 그렇다고 숙소에 마냥 있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다.
동네산책을 하기 위해 조금 걸어다니다 밥을 해먹기 위해 물어물어 찾아간 슈퍼는 도시락, 초코파이, 레쓰비 등등 한국제품들이 많이 수입됐던 러시아와는 달리 낯익은 먹거리들이 없었다. 쌀도 길쭉한 쌀만 판다. 게다가 최소 단위는 1Kg. 이 쌀을 혼자서 짊어지고 다니면 얼마나 걸려야 다 먹을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커보였다. 아마도 화수분처럼 먹어도 먹어도 끝이나지 않겠지.
무엇보다 가장 경악했던 일은 맥주 한 캔에 3유로(약 3,900원)라는 것.
어찌어찌 쌀을 사다 밥을 해먹고, 맥주를 마시고, 밀린 일기를 쓰고, 인포메이션에서 받아온 지도와 굴러다니는 론리플래닛, 인터넷 정보를 이용해 갈 곳을 물색했다. 많은 블로그와 여행책자에서 얘기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다.
헬싱키는 볼 것이 없다.
웬만한 도시의 관광일정은 넉넉하게 잡아놓는 론리플래닛조차도 헬싱키의 추천일정으로는 이틀을 잡아놨다. 그냥 느낌이 좋아 되도록 헬싱키에서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나는 어쩐지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기운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