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러시아-회색의 도시

-모스크바

by 호빵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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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로 접어든 모스크바에는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비가 내릴수록 기온이 점점 낮아져 갔다. 이제는 얇은 파카를 입어도 될 추위였다. 우산을 쓰기에도 애매하게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손에 잡힐 듯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먹구름.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 밖에 나간다는 건 얼마쯤은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모스크바에선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어쩐지 이 도시는 어둡고 흐린 하늘과 비까지가 이곳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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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여행하며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크다!’라는 감탄사다. 좁고 높은 건물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내가 살던 곳과 달리 널찍한 도로에는 넓고 큰 건물이 말 그대로 툭툭 던져져 있는 듯 싶었다. 만약 건물을 아이로 친다면 뼈대도 크고 살집도 있는 우량아를 보는 느낌이랄까. 모든 것이 내가 알던 것과 1.5배쯤 큰 기분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이겠지만.

큰 건물들을 지나쳐 중심가로 이동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중심가에서 약간 뒤쪽으로 들어간 곳. 그리고 처음에 중심가 역에서 내려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정거장 전의 뒤에서 내려 찾아갔던 것이라 중심가로 이동하니 처음 보는 복잡한 도심이 나타난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길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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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건물은 크고 굉장히 화려하지만 가까이 가 들여다보면 세공이 거친 느낌이다. 조각이나 유물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볼 때면 위압감이 느껴지도록 거대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어딘가 모르게 거친 느낌이 있다. 사람들이 너무 커서 작고 세밀한 부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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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중심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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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크렘린 궁, 일명 테트리스성당이라고 불리는 바실리성당, 레닌이 미라상태로 전시되어 있다는 레닌묘, 붉은 광장은 중심가에 모여있다. 그 옆에 국립박물관과 굼 백화점까지 있어 걸어서 하루종일 구경하기에도 모자랄 지경이다. 물론 이건, 그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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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3박4일을 모스크바에 있었고 그 사이에 매일매일 붉은 광장에 들렀지만 크렘린은 내가 있던 날에는 개방하지 않았고, 레닌묘는 보수중이어서 천막을 치고 관광객의 접근을 막았다. 어느날 아침에는 붉은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들어가는 나를 붙잡고는 가방 안을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은 푸틴의 생일날이었고, 정작 그 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고 하나 모스크바의 광장에서는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붙잡고 가방검사를 하고 있었던 거다. 사람들은 늘 그렇듯 불친절하게 지나갔다. 그래도 대도시에 오니 전보다는 영어를 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길을 물었을 때 알려주는 사람의 비율은 조금 늘었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자잘한 거절이 반복되며 피로가 쌓여 작은 친절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오후, 붉은 광장에서 아르바트 거리를 가기 위해 길을 물어봤던 사람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하고 가장 영어도 잘 했다. 가는 길을 알려주고 나서도 한참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했다. 모스크바는 어떻냐는 그의 질문에 곤란한 얼굴을 하며

글쎄, 여긴 계속 비가 와.

라고 하자 웃으며 그건 전형적인 이곳의 날씨라고 말했다. 나도 같이 웃으며 ‘전형적인 모스크바’하며 중얼거렸다.

‘전형적’이란 말은 이곳을 수긍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모스크바에서 지낸 날들은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만도 않았다. 글쎄, 뭐랄까, 나쁜 날씨도 불친절한 사람들도 모두가 다 전형적인 모스크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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