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러시아-모스크바, 날 좀 환영해 주겠니

-모스크바

by 호빵씨

여행을 하다보면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물론 만나는 장소도 많아진다.

만나는 사람이 모두 나와 궁합이 맞는 건 아닌 것처럼, 장소 역시 궁합이 맞고 안 맞고가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굉장히 좋았던 도시가 누군가에겐 최악의 도시로 남는 법이라 생각한다. 내가 그 궁합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처음 그 도시에 도착할 때의 날씨, 기분, 처음 만나는 행인의 친절도, 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아, 이 도시는 나를 환영해 주는 군’ 혹은 ‘이 도시는 나랑 궁합이 너무 안맞는데’를 결정하는 것.

그렇다면 러시아의 수도이자 러시아 여행 계획 당시 가장 많은 날을 할애해서 구경하려 했던 모스크바는 어떠한가.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타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모바르에 뜨거운 물을 뜨러 갔다.

물을 받고 있는데 우리 칸 차장이 지나간다.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인사하는데 너무 집중한 탓일까 물받던 통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들고 있다 손을 데는 참사가 벌어졌다.

러시아어 발음자체가 굉장히 툭툭거리는 느낌이라 그냥 말을 하는데도 (각 객차에는 두 명의 차장이 돌아가며 근무하는데 이들은 러시아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거의 못한다고 보면 된다) 좀 무서운 인상인 차장은 쯧쯧하며 혀를 차더니 자기 자리로 들어가 컵을 빌려주고(이거 승객한테 무료로 빌려주는 컵인 듯) 타올로 내 물병을 집어다 내 칸까지 가져다줬다. 계속 차가운 물로 식혔더니 화닥거리기는 하지만 다행히 물집도 안생기고 하루쯤 지나니 가라앉았다.

여전히 기차는 가을의 자작나무 숲을 통과했다. 10월 초만 돼도 러시아는 겨울이고 눈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던 풍경은 대체 어디 간 걸까. 그땐 이미 10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모스크바까지 가는 5일동안 갑자기 날씨가 드라마틱하게 변해 겨울이 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인 걸까. 눈 내리는 벌판을 열차로 달려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4박5일 동안 달리다보면 휴대폰도 태블릿PC도 완충 한번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그러나 기차에서 콘센트는 화장실과 복도의 두세군데밖에 없다. 이르쿠츠크까지 오는 기차 안에서는 늘 콘센트의 전원을 켜뒀다면 여기는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는 콘센트 전원을 꺼둔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타는데 사용하지 않는 시간이 없을 리가.

결국 차장 마음대로 전원을 꺼뒀다가 사람들이 충전하겠다고 가서 말하면 그제서야 전원을 올리는 것 같다. 할일이 없어 태블릿으로 한참 미드와 영드를 보고있었더니 순식간에 전원이 거의 다 방전돼갔다. 충전시키겠다며 전원을 올려달랬더니 안된다고 쏘아붙인다.(손 뎄을 때 친절하게 도와준 그 차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뭐라뭐라 화를 내는데 한참을 듣고 있자니 전화기 충전은 가능하지만 노트북은 안된다고 하는 듯하다. 그러나 제대로 사정설명을 못 들으니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맘 같아선 자가 발전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능력은 없으니 찌그러져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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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찝찝하고 기분나쁜 마음으로 빨리 기차에서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예카테린부르크를 지나간다. 복도에 서있다가 만난 사람과 얘기하는데 좀 전에 눈 쌓인 자작나무 숲을 지나쳤단다. 나도 눈 쌓인 자작나무 숲을 보고 싶었는데, 를 속으로 중얼대며 15분 정차하는 역에서 바깥바람을 쐬러 기차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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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기차계단의 맨 마지막 부분, 땅에 그려진 흰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땅이 아니라 턱이었다. 턱과 땅 사이를 잘못 디디는 바람에 계단에서 그대로 발이 삐끗해 넘어져 버렸다.

넘어진 뒤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 주변에 아는 얼굴들이다. 벌써 열차는 반절 이상 지나왔고 이 사람들과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같이 기차를 타고 왔다.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러시아의 모든 교통수단은 강제 MT니까. 창피해서 용수철처럼 번뜩 일어났지만 이 다리 아무래도 심각하게 삔 것 같다. 괜찮은 척하며 절뚝대지 않으려 노력하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침대로 올라가 누워버렸다.

평소에도 운동신경과는 거리가 멀어 자주 넘어지고 부딪치고 하는 나지만 그래도 그런 나를 알아 알아서 몸을 사리며 다녀 심각하게 다친 적은 없는데 이번엔 제대로 다친 것 같다. 부어오른 오른쪽 발목이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생각을 않는다. 이틀 뒤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하게 삔 건데 그게 모스크바가는 기차 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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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모스크바는 또 어떤가.

도착하자마자 꾸물꾸물 비를 흩뿌리는 날씨에, 중심가에서 가깝다는 숙소는 아무리 찾아도 나올 생각을 않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더니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저 혹시, 이 주소를 찾아가려면.. 하고 물었더니 밖으로 나가라며 소리를 지르며 내쫓았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두어시간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헤매다 겨우 호스텔을 찾았지만 이번엔 불친절한 직원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 짐을 풀었다. 두시간을 꼬박 걸은 발목은 통증은 없지만 더 부어있다.

만약 한국이라면,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냥 참고 두고 봤겠지만 이제 여행 초반, 게다가 800Km를 걸어야 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몇 주 안남은 상황에서 이대로 방치해 두긴 불안하다. 안심하고 싶어 연결을 시도한 한국의 의료인 선배는 상황설명을 듣더니 병원에 가란다.

결국 보험회사와 통화해 영어진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은 뒤(러시아어로 진료받는 건 불가능하니까) 또 지하철을 타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먼 길을 돌아 병원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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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작은 동네의원처럼 생긴 외관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크다. 진료과도 많고 응급실도 있다. 직원도 아주 친절하고 러시아인답지 않게 영어도 잘한다.

그러나, 문제는 나였다.

그동안 러시아인보다는 영어를 잘 한다며 뿌듯해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길을 물어보고 먹을 걸 주문하고 어디서 왔느냐, 어디에 가느냐를 물을 때의 얘기였다. 알 수 없는 서류의 이름과 모르는 의학용어가 나오자 무슨 얘긴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어찌어찌 수속서류를 만들고 어찌어찌 진료를 받고, 의사의 안내에 따라 엑스레이를 두 방 찍은 후 돌아와 뼈와 인대에는 이상이 없으니 앞으로 2주간 운동하지 말고 약 바르라는 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병원비를 계산하려는데 다 합해서 300정도의 숫자가 보인다.

300루블? 이정도면 양호한 편이군 하며 카드를 빼드는 내게 무시무시한 금액이 청구됐다. 알고보니 300루블이 아니라, 300유로였다. (지금 환율로 1루블은 18원쯤, 1유로는 1280원쯤. 병원 이름이 유러피언 메디컬 센터였던건 돈도 유로로 받는다는 뜻이었나보다) 이 돈이면 기차삯을 제외한 러시아에서의 여행경비로 환전해 온 금액과 거의 맞먹는다.

이건 여행자보험을 청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온갖 서류를 챙겨들고 돌아오는 깜깜한 모스크바의 밤거리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모스크바 제발, 날 좀 환영해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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