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네피요르드
8인 도미토리의 새벽 여섯시.
아마도 그 시간엔 방에 있는 사람들이 자고 있을테니 시끄럽게 짐 챙기기 미안하다며 전날밤 정리를 다 해놓고 잤는데, 우리 방에 묵는 모두는 이 날 새벽기차를 타고 피요르드에 가는지 다들 일찌감치 일어나고 일어나자마자 방 불을 켜고 부산스럽게 짐을 싼다. 덕분에 알람없이 잘 일어나긴 했다만, 얘들은 혹시 이 방의 누군가는 그 시간에 피요르드에 가지 않고 잠을 잘테니 방해하지 말고 조심해야겠단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송네피요르드에 가는 코스는 이렇다.
아침에 오슬로-뮈르달의 열차를 타고,
뮈르달에 도착해 뮈르달-플롬의 사설기차를 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며 경치를 보고,
내려와서는 플롬-구드방겐까지의 페리를 타고 피요르드 지형을 구경한 뒤,
구드방겐-보스의 버스,
보스-베르겐의 기차를 타고 돌아와 베르겐-오슬로로 돌아오거나 다른 곳으로 가는 여정이다. 직접 피요르드 지형을 걷는 트레킹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호스텔 같은 방 애들 덕에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고 무사히 기차를 탔다. 엊그제 정보를 준 아저씨 말로는 열차 진행방향 오른쪽보다 왼쪽이 훨씬 풍경이 좋단다. 열차에 올라타보니 내 자리는 왼쪽이다. 그렇지만 복도측 좌석.
노르웨이는 산이 너무 많아 철도와 버스가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단다. 그래서 저가항공이 발달하게 됐다고. 그래선지 계속 산을 타고 오르고 물을 지나가고 험한 길을 굽이굽이 간다. 그런 곳을 계속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목이 아프고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들어 첫 번째로 하는 멀미다. 그동안 스물다섯시간 배타고 사박오일 기차타고 페리타고 할 때도 안 하던 멀미를 말이다. 기차탄 후 시간이 지나자 주변 사람들은 가져온 음식을 꺼내먹기 시작하고, 나도 배가 고파오고, 내 가방엔 분명 핫도그도 들어있는데 멀미나서 토할 것 같아 못 먹으며 참다참다 결국은 잠들어 버렸다.
옆에서 절경이 펼쳐지든 어쨌든. 이십분쯤 자고 일어났더니 속은 좀 가라앉았다.
그리고 기차는 어느새 산을 꼬불꼬불 올라가 눈이 쌓인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역시, 이런 날씨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거 였다니까. 그동안 북유럽에 비 내리는 거 구경하려고 온 게 아니야.
주변에 사진찍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싶었는데 보니 다들 관광객이다. 잠깐 서는 역 밖으로 나와 눈싸움을 하는 사람도 역시 관광객. 그냥 어딘가에 가기 위해 이 기차를 탄 듯한 노르웨이인들은 매우 흔한 풍경이라는 듯이 신문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거나 자기 할 일을 했다.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다니 이 쿨한 민족이란'하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부터도 한국에서 멀리 가는 차를 타면 거의 대부분 졸거나 햇빛 가리려 커텐을 치곤 했었다.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주변을 더 자세히 보게 하지만 이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땐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그 흔한 풍경도 관심을 갖고 보기만 한다면 이렇게 멋지겠지.
뮈르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연결되는 플롬까지의 사설기차를 탔다. 관광용의 사설기차라 지형을 설명해 주는 안내방송도 나온다. 기차는 조증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듯한 아저씨의 방송을 들으며 아까 꼬불꼬불 올라온 산길을 다른 길로 다시 내려간다. 세네칸 정도 되는 작은 기차가 급경사를 내려갈 땐 가끔 기우는 것 같아 안전하긴 한 건지 괜히 의심이 갔다.
여름철 성수기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한 번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는데 내가 갔던 10월 중순은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창밖에 뭔가가 보이면 와~하며 몰려갔다 다시 또 반대쪽으로 와~하며 몰려다녔다.
기차로 산길을 타고 내려와 플롬에 도착하니 어느덧 눈은 녹아있었고 페리시간까지는 한시간 남짓이 남았다.
기차 안에서 안내해 준 기차역 박물관이라도 구경하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데 누가 아는 척을 한다. 누군가하고 보니 엊그제 오슬로의 호스텔에서 내게 송네피요르드의 정보를 줬던 덴마크사는 아저씨. 전 날 기차를 타고 와서 플롬에서 하루 묵었단다. 어제는 비가 왔는데 오늘은 맑아서 아침 산책하기 좋았다며 좋은 날 왔다고 한다.
반갑게 인사하고 싸 온 핫도그를 나눠먹고 있는데 또 누군가 인사한다. 덴마크사는 아저씨가 다음날 호스텔에서 나와 같은 모습으로 피요르드를 고민하는 학생을 만나 정보를 줬다는 대학생이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있단다. 스웨덴에서 온 친구와 숙소에서 만났다는 대만아이까지 함께 얘기하다 페리에 올랐다.
페리의 처음은 날아드는 갈매기 떼와 그들에게 빵을 던져주는 사람들로 시작됐다.
빵 좀 얻어먹겠다고 갑판 위를 습격하는 건 아닌지 조금만 더 접근해도 도망가버리겠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이상 접근하진 않았다. 진심 다행이었다.
처음엔 ‘와’, ‘피요르드 멋지다’했지만 두시간 가까이 페리를 타려니 삼십분 지나면서부터는 이가 딱딱 맞부딪칠 정도로 춥고 풍경은 단조롭다.
처음 피요르드를 갈까 말까 망설였던 건 이 곳이 이 많은 돈을 들여올만큼 감동을 줄까? 였는데(전체 비용이 적어도 우리돈으로 20~35만원쯤은 하는 듯) 한 번쯤은 봐둬도 좋을 법한 풍경이긴 하지만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지나가버리는 게 전부라 만족도가 그리 높진 않다. 다시 한 번 정보를 좀 많이 갖고 천천히 걸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걷는 속도로 세상을 받아들이는게 가장 편한 사람이니까.
페리를 타고 내리자마자 보스역으로 향하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와 덴마크사는 아저씨, 대만아이는 베르겐으로 가기로 하고 스웨덴 교환학생은 역에서 다섯시간을 더 기다려 오슬로가는 기차를 타고 간단다.
그렇게 간 베르겐. 역 근처 숙소에 예약해 둔 나와 덴마크아저씨와 달리 대만아이는 먼 곳에 숙소를 예약해뒀단다. 그리고 주소만 알 뿐 거기까지 가는 방법을 모른다. 도착해 인포메이션센터에 물어보려 했단다. 그러나 북유럽에서 이 시간까지 인포메이션센터가 문을 열고 있을 리가. 어째 이 친구, 나보다 더 대책없는 느낌이다. 이 친구가 제대로 숙소에 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하는 아저씨를 버려둘 수 없어 함께 역 앞에서 두시간 가까이 헤맸다.
이제 확실하다.
노르웨이인들은 친절하지만 길을 잘 모른다. 두시간의 헤맴 끝에 결국 대만아이는 베르겐일정을 포기하고 오슬로로 향하는 표를 끊어 가버리고 나는 체크인하러 숙소에 들어갔는데 어제 분명히 했던 예약이 안돼있단다. 며칠 전 베르겐에서 축제가 있어 모든 숙소가 자리가 없다고들 하는 소리를 건너건너 들어 예약까지 하고 왔건만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가려는데 다행히 도미토리에 한 자리가 비어있단다.
마지막에 아주 살짝 험난했던 여정을 마치고 들어가 침대에 누우니 11시. 웬만하면 밤엔 안 돌아다니는데 오늘은 정말 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