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노르웨이-북유럽의 로망은

-오슬로

by 호빵씨

사실 내겐 북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같은 것이 있었다. 사계절 중 겨울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에 겨울이 길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 자연은 예쁘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눈처럼 깨끗하며, 삶은 여유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북유럽은 언젠가는 가고싶은 곳이었다. 물론 물가가 비싸다는 얘기는 하도 많이 들어 돈을 많이 벌어서 가려고는 했었지만 말이다. 며칠 있었던 핀란드에서는 눈에 딱 띄는 관광지는 없어 약간 심심한 감이 있긴 했지만 맑고 쌀쌀한 날씨와, 낮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숲같은 것 사이에서 걷는 일이 즐거웠다. 어느정도 내가 꿈꿨던 북유럽의 모습 그대로랄까.


그러나 그렇게 고이고이 지켜온 북유럽의 로망은 오슬로에 도착하고 다음 날 아침부터 약간 삐끗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 잦은 이동에도 좀 지치기도 했고 여유롭게 즐겨볼까 하는 마음으로 전날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사람들에게

저는 오슬로에서 좀 오래 있고 싶어요

라고 하자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볼 때 이곳이 생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가? 싶어 계획을 살짝 수정하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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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수없이 많은 비합리적인 이유 때문이듯, 이 공간과 내가 맞지않는다고 느끼는 것 또한 수없이 이어지는 꼬이는 일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곳에 있을때도 돌아와서도 오슬로는 어쩐지 그리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 이유를 차근차근 돌아보면 이 날이 아침부터 좀 꼬여있었기 때문인듯도 싶다.


전날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표를 사러 기차역으로 출발한 나. 가자마자 기계에서 싼 표를 사고 기차역에 붙어있는 슈퍼에서 장도 보고 돌아와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가려고 정리하다가 사온 기차표를 확인하는데

이런, 맨 마지막 미니프리스표가 잘못 예매됐다.

19일 저녁에 도착하는 기차표여야 하는데 20일 저녁에 도착하는 표로 된 것이다. 20일은 새벽에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하는 날이다. 환불도 안되는 미니프리스표라 몇 번 확인하고 산다고 했는데 이런 실수를 해버리다니...

399크로네, 당시 환율로 약 8만원쯤 되는 표라 쿨하게 포기하자는 되지 않았다. 이걸 어째야하나 하며 잠시 멘붕상태에 빠져 고민하다가 밑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에 다시 역으로 갔다. 가자마자 직원에게 멘탈이 털린 표정과 당황하여 한 톤 높아진 어투로 빠르게 (영어를 잘 하지 못하고 원래 말 자체를 느리게 하는 편인데 위급한 상황이 되니 말이 뇌를 거치지 않은 듯 속사포로 나왔다. 환경의 위대함이란)

나는 19일 표를 사려고 했으나 기계가 표를 잘못 줬다

며 표를 바꿔줄 것을 요청하자 이쪽으로 오라며 아주 친절하게 선선히 환불해줬다. 아마도 표를 산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해준 것 같다. (나중에 사정이 생겨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예매한 미니프리스표를 일부라도 환불받을 수 없냐고 묻는 사람을 봤는데 그 땐 환불이 안 된다며 얄짤없이 잘라내는 걸 봤다. 어쩌면 내가 운이 좋았던 걸지도)

상황은 해결됐지만 일단 한번 높아졌던 심박수는 금세 낮아지지 않았다. 얼굴이 벌개진 상태로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데 눈 앞에 비둘기 시체가 보였다. 아, 정말이지 살아있는 비둘기도 싫지만 죽어있는 비둘기는 정말 소스라치게 싫다. 그리고 그 날 하루종일 안 치우더만 ,숙소 왔다갔다하면서 대체 몇 번을 봤는지. 나중에는 그 근처쯤 오면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걸었다.

아침에 몇 번 놀란 후 숙소에 들어오니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이런 날은 아무데도 나가지 말아야하지만 나는 이미 다음날 출발하는 피요르드 티켓을 구매했고 오슬로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듯 싶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 놀다가 뒤늦게 길을 나섰다.

뭉크미술관에 가려고 지하철은 어디서 타는지, 1일 교통권은 얼만지 물어보려 인포메이션센터에 갔는데 직원이 말하길 뭉크미술관은 엊그제까지만 열고 지금은 전시준비 중이란다. 크렘린과 레닌묘가 마치 데자뷰처럼 스치고 지나가 아, 이건 또 뭐지의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자 직원이 아주 활짝 웃으며 네가 언럭키한 거라고 말했다. 어제도 느꼈지만 여기 사람들은 참 친절하게 잘 웃어준다. 이건,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도 없고.

엄청나게 친절한 직원은 대신 내셔널 갤러리에 가라며 추천해줬다. 뭉크의 절규도 마돈나도 있다고. 뭉크미술관에 갈 예정이 없어지고 나니 1일 교통권을 사야할 필요성을 못느껴 시내를 걸어다니기로 생각하고 지도를 받아 나왔다. 지도를 보며 갈 곳을 찾는데 미니바틀 갤러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비를 맞으며 한참을 찾아헤맸는데 닫혀있다. 앞의 표지판을 보니 토요일 일요일만 단체관람객 대상으로 연단다.

점점 더 감은 확실해졌다. 이 도시는 나를 환영하고 있지 않구나. 모스크바에 이어 나를 거부하는 도시로 확정되었다. 이쯤 되면 오슬로, 만회를 위해 내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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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하고 돌아가 내셔널 갤러리를 구경하고 또 지도를 봤다. 근처에 왕궁이 있다기에 구경하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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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공원과 광장이 있는 곳에 큰 건물이 서있는데, 아무리 지도를 살펴봐도 이 위치가 왕궁인 것 같다.

근처에 가니 근위병이 서있는 걸로 봐선 왕궁인가 보다. 왕족이 지하철타고 다니고, 자전거 타고 다니며 시민들과 어울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렇지않게 궁이 서있는 걸 보니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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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보고 근처 시청을 구경한 뒤 근처에 있는 요새에 갔다. 역시나 바닷가 도시답게 요새가 있다. 요새라면 역시 이런 느낌이지, 싶었던 수오멘리나 요새에 비해면 여기는 그냥 성곽에 마을세워놓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도 어느 때는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였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보고 저것이 산 속에 돌아다닌다면 얼마나 무서울까를 생각했을 때처럼. 좀 전에 보고 온 내셔널 갤러리에서 짐승이 사람을 물어 뜯는 그림을 보며, 짐승이 짐승을 물어뜯는 건 무감각하지만 사람을 뜯으니 무섭다 싶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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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고나니 바지자락이 온통 눅눅하다. 비가 날리는 날씨라 더 지친다. 해지기 전에 얼른 숙소에 들어가야겠다.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지 확인하려 지도를 펼쳤는데 사람들이 ‘길 잃었어요?’ 혹은 '도와줄까요?' 하며 다가온다. 전날부터 계속 느꼈지만 확실히 여기는 사람들이 친절하다. 지도만 펼치면 길을 잃었느냐며, 도움이 필요하냐며 말을 건다.

그리고 더 확실한 건, 이 사람들한테 길을 묻느니 차라리 내가 지도를 찾는게 더 빠르다는 것. 노르웨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지만 길은 잘 못찾는 것 같다.

분명 지도상으론 저쪽으로 가야하는 것 같은데 이쪽으로 가라하고, 지도를 보며 지금 우린 여기있는 거 아닐까요? 라고 물으면 자꾸 이상한테를 짚으며 아니래 여기있대. 게다가 괜찮아요, 나 혼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해도 옆에 서서 계속 뭔가 조언을 한다. 그래도 현지인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들의 말만 듣고 가다가는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

결국 나중엔 사람들이 지도를 보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골목 안으로 들어가 지도를 보고 나와 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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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참을 걸어오며 내일 기차에서 먹을 음식을 사고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내일은 피요르드, 아침 8시 11분 기차를 타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새벽에 부스럭대며 짐 챙기느라 주변 애들에게 폐 끼치지 않도록 미리미리 짐을 챙겨두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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