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노르웨이-베르겐이 없었더라면

-베르겐

by 호빵씨

전날 밤, 대만아이가 예약했다는(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숙소 가는 길을 묻고 있을 때였다. 여러군데서 길을 묻다 중국식당에 들어가 길을 물었고 아저씨는 우리에게 말했다.

볼 것도 없고 맨날 비만 오는 이런 데는 뭐하러 왔냐고.

하지만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던 아저씨는 걸어가는 우리의 뒤에 대고 이렇게 외쳐줬다.

Enjoy your rainy day!

왜 오슬로는 흐리고 비가 올까, 비와서 흐린 북유럽은 왜 예쁘지 않은 걸까로 실망하면서도 ‘베르겐은 다르겠지, 암, 다를 거야’라고 잔뜩 기대하고 온 내가 그 얘기를 듣고는 동행에게 ‘설마,’하고 운을 뗐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고있는 듯한 동행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기는 일년 중 3분의 2는 비가 온다고. 비 오던 오슬로에 이어 비오는 베르겐의 당첨인건가.

헐, 미리 알았더라면 여기서 이틀밤이나 잘 계획을 안 세웠죠.



전날 밤 늦게 잠들었지만 배고파 일찍 깨서 밥을 해먹으러 나왔다. 방 안에 주방이 있는데다 주방기구를 돈 내고 빌려야 하던 오슬로와는 달리 여긴 주방이 독립돼 있고 식기도 넉넉하다. 완벽한 냄비밥을 짓고 라면 끓여 다운받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먹은 뒤 기분이 좋아져 신나 돌아왔는데 여전히 우리 방 애들은 한밤 중이다.

어차피 이 날은 산책하며 돌아다닐 예정인데다 중국식당 아저씨의 '볼 것도 없고 맨날 비만 오는'이 계속 머릿속에 뱅뱅돌아 그냥 천천히 숙소에서 게으름 부리다 나가야겠다 싶어 씻고 밀려뒀던 빨래를 하러 나갔다. 어제 설명 들었던 대로 복도에 있는 세탁실을 찾아가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척한다. 오슬로 숙소에서 만났던 핀란드교환학생이다. 스타방게르에 갔다가 돌아왔다며 오늘은 송네피요르드에 다녀올 거란다. 어떻냐고 묻기에 춥더라고 대답해줬다. 이곳은 괜찮던가요?라고 물었지만 막 돌아와서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베르겐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여전히 궁금한 채로 세탁기도 돌리고 점심먹을 빵도 준비해서 느지막히 나왔다.



별 기대없이 나왔지만 중국식당 아저씨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날씨도 괜찮고 따뜻하다. 오랜만에 파카를 벗고 가디건만 걸치고 나가도 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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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에서 지도를 받아 근처의 관광지를 체크해 나왔는데 유명한 어시장이라는 곳은 어제 우리가 대만아이의 숙소를 찾아며 역 앞에서 뺑뺑돌며 한참 헤맸던 그 근처다. 그냥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길과 건물은 아침이 되자 지나다니는 관광객 및 사람들로 가득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브뤼겐의 오래된 집을 보고 노르웨이 집들은 참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어 저렇게 기울다간 다함께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해주고 할 일이 없어 근처 교회에 갔는데 공사하느라 문을 닫았단다.


그렇지만 문제 없다. 선선하고 맑은 날씨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오늘은 또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내 시야 저 멀리 보이는 전망대. 숙소에서 잠시 찾아봤던 베르겐의 관광정보로는 역 근처에서 전망대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근처까지 가서 트램을 타고 올라가야하는 먼 거리라 했지만 그닥 멀어보이지 않는데다 딱히 할일도 없어 산책 겸 걸어가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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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는데 뭔가 박물관같아 보이는 것이 있다. 지도에도 딱히 관광명소로 표시돼있지 않았고 문을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무료입장’이라고 써붙어 있기에 들어갔는데 박물관엔 정말 아무도 없다.

전시관은 센서등으로 돼 있어서 평소엔 컴컴하다가 누군가 들어가면 안에 불이 켜지는 시스템인데 아마도 오늘의 관람객은 내가 전부였던 걸까. 내 앞에는 불 켜진 전시관이 하나도 없었다. 혼자 돌아다니며 복도에 불 켜고, 전시관에 불 켜고 하다보니 내가 불 켜는 사람인지 관광객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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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박물관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아마도 군사박물관 혹은 전쟁사박물관인 듯. 그 동안의 군복과 무기들의 변천사, 2차 세계대전당시의 자료와 파병나간 국가들을 쭉 전시해 놨다. 파병나간 국가 중엔 6․25전쟁 때의 한국도 들어있었다. 노르웨이에서도 왔었군.

전시물이 이렇다보니 전시분위기도 어두침침하고, 어두컴컴한 전시관을 지나가면 내 앞에서 불이 하나씩 팟하고 켜지고, 지나가는데 총, 포탄소리와 함께 사람들 함성소리같은 것도 들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하니 어쩐지 으스스해져 빨리 걸어나오는데 식당같은 것이 보인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물과 차가 놓여있다. 어디에도 돈을 내야하는 곳이 없고 안내하는 사람도 없어 차를 한 잔 우려나왔다. 이 날 결국 박물관에서는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광경만으로도 참 기묘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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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서 천천히 동네구경을 하며 산을 올랐다.

비도 안 오고 적당히 따뜻한 데다가 공짜 차까지. 이 도시는 어쩌면 나와 잘 맞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나는 항상 대도시보다 지방 소도시를 다닐 때 그 공간에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런 곳에서 산책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기도 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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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 넘게 산길을 올라가는데 어제 각자 숙소로 들어갔던 동행아저씨를 만났다. 꼭대기 전망대까지 갔다 비행기시간에 맞춰 내려가는 중이란다. 서로 기대하지 않았던 베르겐 날씨가 참 좋다며 좋아한 뒤 엇갈려, 나는 올라가고 아저씨는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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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가로질러 걸어올 때는 관광객이 하나도 없었는데 전망대에 오르니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한참을 구경하고 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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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엔 유치원 꼬맹이들인지 선생님과 단체로 온 애들을 봤다. 꼬맹이들이 등산복도 제대로 갖춰입고 등산배낭같은 것도 메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선생님들이 꽤 많이 붙어 가고 있었는데 아이가 괴성을 지르면 선생님도 같이 소리질러 주고, 물 웅덩이를 만지며 딴짓을 하는데도 제지하지 않고 지켜봐주는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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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오자 급 피곤해져 더 이상의 관람은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와 밥 먹고 베르겐의 관광정보를 검색하다 방을 둘러보니 10인 도미토리룸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침대 속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컴퓨터를 하고 있다. 예전 와이파이도 자동로밍도 안되던 시절의 호스텔에선

이 정도 사람이 모이면 어딜 갔다 왔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얘기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물론 할 일이 없어서였겠지만) 그 때 여행이 좀 더 재미있고, 더 많은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와이파이 안되는 숙소로 들어가라면 나부터 꺼려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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