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겐
지난 글에 베르겐을 지방소도시 정도로 표현했지만 사실 베르겐은 노르웨이의 제2도시이다. 멕시코만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따뜻하고, 연중 2/3은 비가 오는 곳이며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는 노르웨이의 수도이기도 했던. 음, 또 가장 중요한 어항이기도 하고. 과거 무역항의 기반을 구축하기도 했다는, 이 도시를 왜 평소와 달리 열심히 설명하는가 하면, 글쎄, 이곳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려나.
조금만 걸으면 자연이 나오는 환경도, 나지막하게 서있는 뾰족지붕들도, (운 좋게 당시에는 비가 오지 않았던)따뜻한 기후도 마음에 들었던 나는 전날의 하루 산책으로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이 도시에는 공기마저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는 듯 싶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여기에 내가 살고 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행이 아니라 일상을 이곳에서 보낸다는 느낌은 어떤 걸까. 이 곳의 여유로운 공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루를 지낼까.
어차피 상상은 자유이니, 실제로 생활근거지를 옮기기 위해 드는 수고 부분을 지워버리고, 이 곳에 산지 삼개월 정도 된 듯한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베르겐의 항구 근처에 사는 주민.
느릿느릿 길을 걸어 작은 식료품점에 들러 빵을 한 봉지 사고, 부두의 어시장으로 간다. 관광객과 주민이 섞여 복작거리는 곳에서 누가 관광객일지, 누가 주민일지를 눈으로 헤아려보다 오늘 저녁으로 먹을 생선을 역시 눈으로만 골라본다. 그리고는 어시장을 나와 근처 가게에 들러 소품을 살펴본다. 마치 국자나 작은 접시, 뒤집개 같은 사소한 물건이 없어 한참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쇼핑을 나와서는 잊어버리고 다시 집에 돌아가곤 했던 사람처럼.
윈도쇼핑을 마치고는 근처 공원에 갔다.
호수에 오리들이 떠다니고 있어 빵을 떼 던져주는데 오리들이 몰려들자 근처의 비둘기들이 삽시간에 날아들었다. 빵을 보며 오리가 꽥꽥거리고 울더니 설마, 비둘기에게 먹으러 오라고 신호했던 걸까.
어떤 상상을 하든, 어떤 풍경에 있든 비둘기공포증은 역시 그대로다. 먹이를 던져주고 새들은 아름답게 모여 평화롭게 뜯어먹는 광경을 연출하는 건 안 되겠다. 그러게, 왜 동물을 무서워하면서 자꾸 먹을 걸 주려고 했던 걸까.
기겁하여 오리떼와 비둘기떼를 피해 도망나오던 공원의 입구에선 독립영화 같은 것을 촬영하는 모습을 봤다. 아까 상가에선 뭔가를 취재나온 리포터와 카메라맨을 보기도 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사람은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걷는 오른편 길엔 이슬람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인지 히잡을 쓴 사람들이 문밖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얼마 전부터 주변에 관광객의 밀도는 점점 낮아져있었다.
번화했던 거리를 지나 이 동네엔 무슨 가게가 있는지, 누가 지나다니는지 딴짓을 하며 꼬불꼬불 동네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 몇 개의 공원을 지나쳤다.
공원을 구경하고 바닷가에도 잠시 내려가 보고 벤치에 앉아 빵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지 않는 동안 시간은 베르겐의 속도로 천천히 흘러갔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동안 이곳의 밀도는 가득 채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는 다시 여행자가 되어 다른 곳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