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게공항
삼개월의 여행을 떠나는 내 여정의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워낙 준비한게 없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진짜 준비가 없었던게, 예약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출발하는 배표(이건 전화로 예약하고 당일에 결재한거라 예약이라고 봐도 되는지는 잘...), 시베리아횡단열차 기차표, 오슬로-파리의 저가항공비행기표, 파리-생장의 기차표, 파리의 한인민박집 예약, 이스탄불-인천의 비행기표.
그 중 오슬로에서 파리 생장으로 이어지는 예약은 생뚱맞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이걸 왜 예약 해둔거지? 아마도 출발하기 전날밤 이래도 되나하는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하다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야 싸다는 정보를 얻어서 샀던 듯 싶었다. 그러고나니 기차표에 맞춰 그 전엔 파리에 도착해야했고, 저가항공도 미리 예매하면 싸다고 했고 하는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았는가 싶다. 출발 전날 밤에 신들린 듯 폭풍 예약을 마치면서 왜 첫날 러시아에서의 숙소는 예약하지 않았는지, 물가 비싼 북유럽은 저가항공이든 기차든 예약할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긴 하지만 뭐, 내가 원래 그렇지, 하고 넘어가면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러다보니 예약된 비행기표에 맞춰서 중간의 일정을 조정해야했고 베르겐을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비행일정에 맞춰 오슬로 뤼게 공항으로 가야했다. 내 비행기는 아침일찍 출발하는 비행기. 며칠 전부터 숙소를 계속해서 검색했지만 조건에 맞춰 나오는 곳은 없었고 뤼게공항에서 노숙을 했는데 괜찮더라는 평만 나와 결국은 노숙을 결정하고 가야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거의 대부분 비웃고, 나조차도 어느 정도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 난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다. 그렇다고 아주 심한 건 아니고 낯선 곳에 가면 잘 자지 못하고, 침대에서 자야하며, 내 침대 주위에는 벽이 있어야 하는 그런 정도.
나이를 먹는다는 일은 과히 상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 나쁜 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때 좋은 점도 조금씩은 생기기 마련이다. 내 경우 30대로 접어들고 생긴 좋은 점 중 하나는 예전보다 내 몸의 상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엔 무턱대고 그냥 돌아다녔다면 이제는 내가 어떤 포인트에서 체력이 딸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아주 조금 더 조심하게 된다는 장점이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도 노숙은 몸과 마음 모두가 비추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차에 타자마자 잠들어 도착한 10시쯤의 오슬로가 또 비 내리고 있는 걸 보니 새삼 다시 한 번 베르겐이 고마워졌다. 오슬로에 도착해 뤼게가는 열차를 갈아타고 갔다.
뤼게공항의 느낌은 예를 들자면 인천공항이 서울-인천으로 표시되는 느낌같은 것이다. 외국인들이 서울에 간다며 서울로 검색해 항공권을 구하는데 사실 행정구역상 인천은 서울 옆, 뭐 이런 느낌이랄까. 뤼게도 오슬로 뤼게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기차를 타고 한참 가야한다.
어쩌다보니 기관차 바로 뒤에 탔는데 밤이 늦어선지 승무원들이 계속 거기서 놀고 있었다. 잠들만 하면 떠들어서 살짝 귀찮았지만 내가 잘못 내리려 하자 뤼게역은 다음이라며 말려주고 내리면 문 왼편에 공항셔틀버스가 있다고도 가르쳐줘서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공항가는 셔틀버스는 기차역에서 나오면 바로 있다고 안내했지만 가는 길에 계속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뤼게역에 도착하는 것은 열한시 사십오분인데 북유럽에서 그 시간에 셔틀버스를 과연 운영할 것인가. 뤼게공항 근처의 숙소정보와 더불어 심야 셔틀버스 운영여부는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고 계속 고민만 하고 있다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도착해 셔틀버스에 타고나니 그 시간에 공항에 가는 승객이라고는 달랑 나 혼자. 이러다 공항에서 혼자 노숙하는 건가 싶었는데 가보니 사람이 많이 자고 있다. 역시, 근처에 숙소도 없고 가는 길도 막막한 새벽의 뤼게공항이다. 작긴 하지만 노숙평이 좋았던 대로 공항은 와이파이도 잘 잡힌다.
알고보면 잠자리를 가리는(ㅋ) 내 노숙은 이번이 태어나 두번째. (다시는 하고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공항노숙 두어번 더 했다) 아예 잠을 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누울 의자를 찾지 않고 콘센트를 찾아 와이파이하며 놀며 밤을 새니 눈꺼풀안에 모래라도 들어간 듯이 눈은 서걱거리지만 시간은 잘 간다.
훗, 이쯤이야 하며 밤을 새고 수속을 시작해 큰 배낭을 추가수화물로 부치고 들어가려는데 검색대에서 걸렸다. 딱히 걸리는 게 없길래 가방을 뒤져보시라며 줬는데 아뿔싸, 베르겐에 샀던 캐비어 튜브가 너무 크단다.
분명히 이건 걸릴테니 큰 배낭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밤새다 정신이라도 날려버렸던 걸까, 수화물로 부칠 때 넣는다는 것을 깜박 해버렸다. 버려야 한다길래 다시 1층에 가지고 내려가 이것만 따로 부칠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내 추가 수화물은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안 된단다.
역시, 서양의 저가항공은 정나미가 뚝 떨어질 정도로 철저하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구쳐 두번째로 검색대를 통과할 때 쓰레기통에 포장한 번 안 뜯어본 캐비어를 집어 던졌다. 더 화가 났던 건 그렇게 검색대를 통과해 들어오자 면세점에 똑같은 캐비어 튜브를 판다는 것. 똑같은 제품을 안에서는 팔면서 밖에서 가지고 들어오는 건 안 된다는 이상한 공항법은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된다.
역시 공항은 거만한 느낌이다. 출발 몇시간 전부터 사람을 오라가라 그러고, 보통 도심 한복판에 있는 기차역이나 터미널과는 달리 뚝 떨어져 있어 한참을 가야하고,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참 가리는 것도 많다. 이래서 기차와 버스가 좋은 거라며 씩씩거리다 생각하니 뭘 그리 화를 냈는가 싶다. 저 사람들은 자기 일을 정확히 한 것 뿐인데, 비록 정나미는 떨어지만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는 것을.
아마도 잠을 자지 못해 분노조절능력이 바닥으로 떨어졌나보구나 하며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화를 내고 나니 에너지가 급격히 떨어져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파리에 내리고 있다.
8년만의 파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