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프랑스-언젠가 다시

-파리

by 호빵씨

8년 전이었다. 푸릇푸릇하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과외와 물안경을 팔아 번 돈으로(알바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수경과 수모를 팔았었음)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첫 여행에 대한 열의가 넘쳐났던 나는 가이드북을 짊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몇 백번씩 읽으며 루트를 짰었다. 빵 쪼가리를 사먹으며 기차에서 잠자며 예정대로 도착했던 마지막 도시는 파리였다. 서유럽을 돌 때는 파리 인 런던 아웃, 혹은 런던 인 파리 아웃이 거의 공식처럼 떠돌았을 때니 말이다.



파리 보베공항에 내려 기다리는 줄에 서서 뭔가 불안한 마음에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엔 아, 나 할 줄 아는 불어가 있었는데, 고맙습니다는 메르씨, 실례합니다는 빠르동, 또 할 줄 아는 프랑스어가 있던가? '나'가 Je 였고, 내 이름은 00입니다는 쥬 마뻴 00고 하는 사고과정을 거치며 있는 기억 없는 기억을 끄집어 내고 있을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두 문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때는 다시 8년 전의 배낭여행, 당시엔 정말 열의가 넘쳤기 때문에 생존 언어를 익혀야 한다며 외워왔던 프랑스어가 있었다.

“parlez vous anglais?”(영어 할 줄 알아요?)

“Je ne parle pas français”(나는 프랑스어 할 줄 몰라요)

메르씨, 빠르동과 함께 몇 십번을 했던 말이었지만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 순간 머릿속을 급격히 빠져나가 8년 동안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던 그 말. 그 말이 비행기에서 내려 수속을 밟는 그 잠깐 사이에 떠오른 것이다.

세상에, 인간의 기억력이란 정말 위대하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파리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들르는 도시인데다 여행 출발을 앞두고 무엇엔가 홀린듯이 예약을 해둔 터라 그날 오전 9시 도착에 다음날 오전 8시 출발이다. 다시 한 번 왜? 나는?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 무의식적 충동이 예비한 미래 같은 것이 있어서 정확히 그 날짜에 생장에 도착하고 정확히 그 날짜에 걷는 것을 시작해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기나긴 줄을 뚫고 수속을 마치고, 셔틀버스를 기다려 한시간 반넘게 버스타고 내려 숙소에 도착하니 열두시가 다 됐다. 분명 내 비행기표는 9시쯤 도착이었는데.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침대를 배정받고 나니 지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 파리 일정은 이 한 나절이 전부다. 그리고 예전부터 다시 파리에 가게 된다면 꼭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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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8년 전, 노틀담 성당 앞에서였다. 지도를 펼치다 가이드북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가이드북을 떨어뜨렸다'며 친절하게 주워주었다. 고맙다며 받아들었는데 이 분은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않고 다음엔 어디에 갈 거냐며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오는 것이다. 거절을 잘 못하던 과거의 나는(지금도 잘은 못하지만) ‘나는 퐁피두센터에 갈 것이다’라고 말을 해놨지만 이 아저씨가 자꾸 치근덕거리며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하게 나는 너와 가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아저씨와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나는 중간쯤 걷다가 그냥 나는 다른 곳에 가겠다고 핑계를 대며 퐁피두센터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아마 지금이었다면 괜찮다고 나는 나 혼자 가겠다고 잘랐을 테지만 당시는 어렸으니까. 그러고나서 시간과 동선이 안 맞아 그 곳엔 갈 수가 없었고 이후로도 계속 퐁피두센터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이상한 아저씨 때문에 못 갔다며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했다. 내 파리의 한나절은 퐁피두센터에서 보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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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 처음으로 한인민박에서 묵는 지라 들뜬 마음으로 얼른 옷만 갈아입고 지도를 받아 주인아저씨에게 퐁피두센터 가는 길과 우체국가는 길을 물어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줌마가 어디에 갈 거냐고 묻는다. 본인들은 오르세 미술관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온 아줌마 한 분이 마음에 안 들고, 차에 자리가 남는데 같이 갈 것이냐고 묻고 하길래 나는 퐁피두센터에 갈 거라며 혹시 생각 있으면 저와 함께 가겠냐고 한마디 했더니(지금 아주 깊이 후회한다) 바로 다른 한 분과 함께 내게 붙었다.

출발과 동시에 호구조사를 비롯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시던 그 분들은 내 여정을 듣자마자 부모님이 걱정하진 않으셨냐며, 나 같으면 딸을 이렇게 못 보낸다며, 러시아와 이집트와 터키가 마치 요르단이나 되는 듯 걱정을 쏟아내셨다.

뭐, 그 정도까진 괜찮았다. 한국인 어르신을 만나면 언제든 듣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제는 루브르 박물관을 엊그제는 백화점을 도셨다는 분들의 쇼핑담과 끊임없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일행을 헐뜯는 데는 좀 짜증이 났다. 나는 왜 멀리 파리까지 와서 남의 뒷담화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가장 짜증이 났던 건 마치 나를 가이드로 알고있는 듯한 이 분들의 태도였다.

나도 퐁피두센터는 처음이라구요. 그리고 아무리 내가 길을 잘 찾는다지만 8년 만에 온 파리를 두 시간도 안 돼 현지인처럼 다닐 수 없잖아요, 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내 뒤를 두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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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퐁피두센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팔자는 가이드였던 건가라고 한탄하며 전시를 보는데 이분들 전시에는 흥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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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전시물에서 사탄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사탄의 기운 때문에 너무 힘들다며 본인은 나가있을 테니 구경을 하라고. (아, 이 때 알았다고 한 뒤 계속 구경해야 했다) 결국엔 이 아주머니들이 멍하니 앉아있는 게 신경쓰여 나 역시 보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서야 했다.

왜 파리에만 오면 항상 거절을 하지 못해 이 사태가 벌어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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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밖으로 나와 이제는 헤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본인들의 능력으로는 저녁일정이 있는 장소까지 지하철을 타고갈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여기서 내리면 된다고 노선도를 보며 설명을 했으나 그럼에도 무서워서 갈 수 없다는데는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깊이 한숨을 쉬며 목적지 근처 역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앞으로는 좀 더 이기적으로 내 생각만 해도 되겠다는 것이었다. 굳이 시간을 내 여행을 오고, 할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다 보면 결국 가장 귀한 시간을 투자해 즐겁지 않은 일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물론 사람사이에 배려는 필요하겠지만,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는 사람들을 배려한답시고 그들의 기분을 신경쓰느라 내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행에서든 다른 삶에서든 좀 더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뭐, 이것도 하나의 배움이라고 생각하면, 이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더 적절히 대응하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숙소로 돌아왔더니 저녁식사가 한창이다. 드디어 한 달만의 한식이다. 생김치가 매우 감격적이었지만 그리 맛있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빠른 인터넷으로(역시 한인민박의 생명은 빠른 인터넷 속도다) 카드내역을 확인하고 계좌의 돈을 여기저기 분배하고 나니 시간이 훅 지나가있다. 내일은 새벽같이 생장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야한다.


샤워하고 머리를 채 말리기도 전에 잠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노숙과 퐁피두 관람이 꽤 힘들었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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