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고는 못살아!
남들에게 당한 것을 견디지 못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속이 시원한 사람들이 있죠. 마치 복수의 여신 메데이아처럼 말입니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무엇인가를 되돌려준다는 의미에서 복수란 '교환 개념'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타격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소한 말 한마디일지라도 돌려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박증에서도 이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농담 한마디 한 것인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매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죠.
그럼 이때 일어나는 것을 공격성으로 설명을 할 것입니다. 이 공격성은 어디에서부터 출발을 할까요? 뭔가 받은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충동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감정적인 요소들이 개입하게 되겠죠. 그때 개입하는 감정이 미움입니다. 그렇게 자아는 미워하는 감정을 돌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복수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죠.
그런데 이런 복수를 위해서는 대상이 고정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아니죠. 만약에 범죄를 저질러 놓고 사회를 향한 복수라고 지껄이는 경우가 있다면 그들은 사회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회의 질서에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죠.
진정한 복수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말 진정한 복수일까요? 가끔 이런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복수라면 그 이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복수 이후에 발생하는 책임을 질 수 없다면 무력하게 용서해주는 결과가 되겠죠. 어쩌면 복수의 결과가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나의 권리를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는 복수가 필요합니다. 나의 권리를 되찾아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아닌 공연한 복수라면 크게 의미는 없겠죠. 그저 자신이 얼마나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지를 이야기하는 정도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기에 굳이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을까요?
미국에서는 자신의 딸을 성폭행한 범인을 죽도록 팬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그 아버지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정상참작이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과잉 방어라고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요? 또한 이런 감정은 운전하면서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도로에서 운전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위협 운전을 한다거나 시비를 걸기도 하죠? 운전하는 상황이 예민한 만큼 그런 반응들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니는 복수의 이미지는 이런데 신경증에서 등장하는 복수 환상은 의외로 사소합니다. 말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등장하거든요. 만약에 불쾌한 말을 하나 들었다면 그 사람에게 그 말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제 분석 사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어떤 아이가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되돌려주기 위해서 꾸준히 관찰하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 말을 돌려주기 위해서죠.
복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이드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드가 말 안 듣는 어린아이와 같이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식은 아류 정신분석인 교류분석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복수 역시 자아에서 하는 것입니다. 복수심이 이드에서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장치의 역할이 엄연히 다른데 이드가 복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그렇게 알려진 덕분에 정신의학자들도 자아와 초자아, 이드의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신 장치의 구분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정신분석이 좀 엉뚱합니다. 이점은 나중에 영미식의 정신분석을 다룰 기회가 오면 그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프로이트 전문이 많이 드뭅니다. 학파도 죄다 라캉학파죠. 제 스승께서도 학파는 라캉학파였었습니다.
복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정신구조를 완전히 무시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망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의심'으로 설명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정신의학에서 망상과 의심을 섬세하게 구분하지 않는 측면은 있습니다. 그래서 개념 구분에 혼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보호사로 활동하던 때에 알았던 아이가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의사와 진료한 내용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는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상태였고 종종 입원도 했습니다. 그래도 일상적인 소통이 가능했고 나름 주변에 관심도 많았으며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는 나름의 상담 기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생님. 택시는 반드시 노란 것만 타야 되는 거예요?"
"누가 그러던데?"
"00형이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 박근혜랑 결혼한다고 노래 부르던 그 형..."
"그런데 왜 노란 것 만 타야 되는 거야?"
"노란 거 안 타면 안 된대요. 그래서 제가 의사 선생님한테 그걸 이야기했더니 망상이라던데요?"
"에이 무슨... 그게 망상이면 거기에 대해서 질문이 생기지도 않지."
"그래요? 그럼 뭐라고 해야 돼요?"
"의심으로 보는 게 더 나을 거야. 너는 택시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지?"
"네"
"망상에서는 이미 그 일이 일어났다는 대 전제가 있어서 행동 자체가 막히는 게 등장해. 그런데 너는 그러지 않았잖아? 그렇다면 망상으로 말할 수는 없지. 너의 행동에 그 생각이 영향을 주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직은 택시가 거의 다 노랗잖아?"
그와 나의 대화는 그렇게 매듭을 지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 그는 조현병으로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 번씩 극적인 액팅 아웃을 보이긴 했지만 그것이 조현병의 증거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조현병이란 진단명을 달고 있다고 해서 조금 엉뚱한 생각이 무조건 망상이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복수 환상이 충동과 결합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런 복수의 문제는 딸에게 위해를 가한 아버지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딸을 건드리면 아버지들의 눈이 돌아가죠? 가서 살인이 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거짓말로 한 것일지라도 피해자의 말을 들어주는 아버지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복수 환상을 품고, 그것이 충동과 결합하면 제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듯이 복수에도 마찬가지로 그 책임이 따릅니다. 환상이 실현되었다면 그 뒤에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