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의 원래 이름
프로이트는 상담에서 이야기하는 '전이'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정서라고 까지 했죠.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충동, 성충동과 동성애 충동은 각각 사랑과 우정으로 승화의 가닥을 잡습니다. 이건 누구나에게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혹은 친구와는 서로 닮아가는 부분들이 등장하기도 하죠. 그것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기 보다는 현재의 내가 끌리는 것입니다. 사랑관계의 가장 처음에는 동일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신기하게 생각되는 현상들도 있을 겁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연애라든지 피해를 본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가스 라이팅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죠? 그 관계를 전이 문제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가스 라이팅과 같이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경우에는 전이 문제보다는 피 암시성이 작용합니다. 이 피 암시성이란 타인으로부터 암시를 받는 것인데 집단의 경우 지도자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가 더 쉬워지고 정신과 약물이나 마약 등으로 인해서 높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약쟁이들이 약주는 딜러만 보면 허덕대기도 하죠.
과거의 경험이 현재로 옮겨야 새로운 관계에 영향을 주는 것을 두고 '전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게 느꼈던 감정이 현재의 인물에게 드는 것을 전이라 부르기도 하죠.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나 권리를 누군가에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은 본질의 이동이라고도 하죠.
사랑하니까 나의 것을 내어주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전이라는 말을 쓸 때는 되도록이면 상담 장면에 한정되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는데요, 자기 연애를 설명하는데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을 전이 감정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인과의 트러블로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고 싶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굳이 전이 감정이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죠. 사랑하는 사람이 치료자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사랑을 이야기할 때, 여성 동성애가 아니라면 주로 교환 개념들이 들어갑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죠. 레즈비언에서는 이런 것이 좀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적으로 잘해주는 그런 태도들이 관찰된다고 해요. 제가 몇 년 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어느 중년 여성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레즈 여인이 너무 멋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부치의 경우는 남자들보다 멋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배려심 넘치고 한 모습에 남편의 존재는 이미 사라진 것 같더군요. 그래서 가슴앓이하는 부인도 있었습니다. 사람일 참 알 수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시작하면 모종의 어떤 믿음을 가집니다.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나 믿음이죠. 반드시 결혼할 거라는 소망도 생깁니다. 그래서 젊은 연인들은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굳은 신념을 보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헤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버럭버럭 합니다. 우리는 그럴 일이 절대로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주로 그런 커플은 빠른 시간에 헤어진다는 것을 주변에서 보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단기간 그렇게 죽자고 좋아했는데 너무 빨리 헤어져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은 순식간입니다. 2주를 넘기기가 힘들 때도 있죠.
그러나 그 불같은 사랑이 어떤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그 신화에 따라서 변하지 않을 믿음이 생기기도 하죠.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듯이 사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화시키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은 정말 새하얗게 불태우는 겁니다. 그리고 다 타서 재가 되면 사라지는 것처럼요.
그래서 그런지 플라톤은 사랑을 두고 정신병이라고 했었습니다. 고대 철학자가 사랑을 두고 정신병이라고 했다니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임상에서 사랑이 정말 정신병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조울증 남성분이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밤만 되면 울증이 올라와서 너무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병원을 계속 다녔고 거기서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죠. 둘은 불같은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자기도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분이 갑자기 이별을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조금 더 사랑해줄 수도 있었을 건데 말이죠. 혹시 그런 생각도 해봤을 겁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이 짐이 되지는 않을까? 혹여나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도 병이 유전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던 제가 감상적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밤만 되면 울증이 올라와서 미치겠는데, 여자 친구도 비슷하다는 겁니다. 한참 증상으로 괴로운데 여자 친구한테 전화가 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전화를 안 받을 수가 없죠. 집에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지만 그래도 전화는 받습니다. 그럼 여자 친구가 울면서 빨리 자기한테 와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야 미안. 나 너무 힘들어서 못 가겠어..."
"자기 안 오면 나 지금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소릴 들은 남자는 큰일 났다 하고 그 힘든 몸을 이끌고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그 남자의 고민은 이게 문제였습니다. 너무 힘든데 밤만 되면 그런 전화가 오니까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그는 원래 병으로 꼼짝을 못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움직였다는 거죠. 즉, 그는 자기 스스로 병을 극복을 한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별이 타당하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죠. 무슨 치료를 하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치료의 대원칙은 그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해나가는 것에 있으니까요.
유전 이야기가 나와서 잠깐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조현병이나 adhd와 같은 질환이 유전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신체적인 질환은 계통 발생, 즉 인간종의 전체에 작용하는 생물학적인 요인으로 결정이 되니까 유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격이나 신경증은 계통이 아니라 개체 발생적입니다. 한 개체를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죠. 엄마가 조현병인데 자녀까지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에서는 가족력을 많이 따지죠. 그것을 정신분석에서는 동일시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즉, 그만큼 부모를 사랑하니까 부모를 닮아가게 되었다는 거죠. 혹은 자신의 가계에 신경증에 시달리는 가족이 있으니 유전형질 검사를 해보자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질환이 유전이 되는 것이라면 치료 가능성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높았던 불안>이라는 말로 진단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게 된다고요.
이런 내용들이 애착 이론을 적용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신분석이 애착 이론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애착 이론이 상담을 좀 편하게는 만들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원래 토대를 병리적으로 만들면 과정이 어떻든지 결과는 병리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병이 곧 정상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경증의 유전문제는 꽤 복잡한 내용들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도 나름대로 유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는 있다고 하죠. 그러나 정신질환은 유전으로 결정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신질환자 부모 사이에서도 건강한 자녀가 있고, 건강한 부모에게서도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유전의 가능성은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히스테리 연구에서 프로이트도 [유전] 문제를 조금 따지는 부분이 등장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분석의 초기 시절이기 때문에 아직 구체적으로 이론이 형성이 된 것은 아니어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같은 책에서는 사랑을 가학적이다 피학적이다.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 사랑을 피학-가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점은 완전히 오해라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게다가 가학적인 사람과 피학적인 사람이 만나서 오래 사귄다는 건 이 부분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하는 말입니다.
들뢰즈는 여기에 대해서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가학 증자가 피학 증자를 찾지 않는다고요. 가학 증자는 누군가를 괴롭혀서 고통을 주려는 것이지 고통받길 원하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고 하죠. 피학 증자도 마찬가집니다. 가학 하고 싶은 사람은 피학 증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가 병적으로 맞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 거죠. 저는 이 내용을 두고 프롬이 정신분석을 멋대로 곡해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만 화려하게 한다고 해서 그게 정신분석이라고 할 수는 없죠.
가학-피학은 그 충동의 대립쌍에 따라서 능동-수동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능동적으로 사랑하려 하고 사랑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기는 교환 관계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 나오지 패고 얻어맞는 것에서 사랑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따위로 사랑을 설명하면서 괴로워하면서도 서로 헤어질 수 없는 커플의 이야기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배우자를 떠나지 못한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것이 해결되어도 헤어지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를 괜히 엉뚱하게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그럴듯한 말로 설명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물론 피학증으로 기울어지는 경우도 존재하긴 합니다만, 반드시 모든 상황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때는 약물이 개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쪽의 피 암시성이 과도하게 높아져 있다면 반대쪽 커플이 암시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가스 라이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괴롭지만 잘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관계에서 가학적, 피학적 쾌감이 있다는 주장은 섣부른 판단으로 여겨지는 내용입니다.
정신과 환자가 의사 선생님과 결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현실적 조건을 모르고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신병이라면 현실관계가 모조리 파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현실성 검사란 현실의 조건들을 검토하고 그것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지각하고 있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신경증에서는 의미가 조금 더 다릅니다. 자신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고를 쳐서 주변 사람들과 연결을 모조리 끊어버려도 치료자만큼은 자신의 곁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런 관계에서 주체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좋을 것입니다. 영원불변한 사랑을 꿈꾼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되어야죠.
이런 식의 전이가 등장했다는 것을 무의식으로만 설명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에는 치료자가 설명을 제대로 안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무의식'을 붙이면 그대로 이해하려는 태도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캉은 굉장히 파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분석가는 쓰레기가 되어야 한다
이말의 의미는 분석가가 삶에서 빠져야 한다는 의밉니다. 라캉이 워낙 자극적인 말을 많이 해서 오해하기가 쉬운 측면들도 있죠. 어떤 상담사들은 이 말 듣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말이 굉장히 충격적이라서요. 그런데 그 의미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라캉의 학문 체계를 모를 때, 오해받기가 쉽습니다.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말이 페미니스트들에게서 공격받는 것 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