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랑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탄생의 순간에 부모님과 애착관계를 형성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접착력을 두고 '애착'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개념을 만들어낸 존 보울비 여사는 굉장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안나 프로이트와 멜라니 클라인은 노발대발하면서 존 보울비를 학회에서 쫓아내버립니다.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해집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언어를 배운 이후에 엄마를 알고 아빠를 압니다. 그렇게 자신은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배우죠. 가족을 알고 그다음에는 친구와 우정을 쌓고 점점 성장해 갑니다. 발달 심리학에서는 이 애착 관계를 굉장히 중시합니다. 애착 관계가 순탄하면 성장과정에서든 혹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할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자존감 역시 마찬가지겠죠? 따라서 애착관계가 불안정하면 관계 맺기를 피하거나 모순적인 행동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솔직하지도 않고요. 겉으로만 좋은 척한다고 합니다.
이성과의 애착은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유지하는데도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죠. 관계의 텐션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뢰를 형성하고 텐션이 어떻든 편안하게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신뢰가 형성되는데 문제가 생기면 집착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하죠.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내용 같죠? 그런데 반-프로이트 학파의 학자들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표적인 인간 중심 상담이론의 학자인 칼 로저스도 어린아이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심리상담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조금 의아할 수 있습니다. 애착이 아이의 행동을 결정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렇다 할 차이가 없죠. 정신분석에서의 발달과정 역시도 그렇게 봅니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게 되죠. 그런데 이 시작점을 바꾸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애착'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냐에 따라서 애착이 구분되고 그 구분에 의해서 아이의 행동을 결정하는 겁니다. 양육의 중요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설명하는 이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신분석 임상에서 철저히 금기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양육이 원인이라면 어린아이는 부모의 잘못된 양육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아이라는 결론을 지니게 됩니다. 이는 일반 병리학의 기본개념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병은 생기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예측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아동 분석을 연구하고 있던 안나 프로이트나 멜라니 클라인 입장에서는 임상 자체의 토대를 바꿔버리는 '애착' 개념에 대해서 항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분석함으로 건강해지는 것을 보는데 그 애들이 치료 불가능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 겁니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애착 개념을 설명하면서 책 팔아서 돈은 좀 벌었을지 몰라도 그 개념에 몰두하면 어린아이는 어쨌든 양육의 실패로 문제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애착'이란 어린아이가 스스로 상처를 딛고 건강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분석을 하다 보면 애착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애착을 분석해서 분석 주체가 원하는 대인관계가 무엇인지 이끌어내는 것을 분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관계를 다루면서 정신구조가 어떤 식으로 형성이 되었으며 또 그 구조로 어떻게 현실을 경험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정신분석에서 흔한 오해 중 하나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서 현재가 이렇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 굉장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겁니다. 그 애착 관계가 무의식에서 등장한 것도 아니고요.
엄마-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곤 하지만 그 안에는 부모를 아끼는 마음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미리 방어부터 합니다. 무의식 어쩌고 하는 건 절대로 아니라고요. 부모에게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사전 방어를 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거든요. 그렇게 자신의 증상의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고, 부모를 죄인 만들면 병을 조금 수용할 수는 있습니다. 대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애착 문제에서 벗어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직장을 가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신뢰관계가 없어도 비즈니스 관계라면 만나야 하죠. 그 관계를 더 힘들어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현대인은 혼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경우들도 꽤 많습니다. 물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안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죠. 우리가 집에만 있는다고 하지만 온라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과 만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대상 리비도라는 개념이 들어갑니다. 대상 리비도는 처리되기 위해서 대상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을 대상 없이 처리하려 하는 것이 신경증의 목적이기도 하죠. 물론 신경증 상태에서는 대상 리비도를 자아 리비도로 변환하여 혼자서 처리하려고 합니다. 대신 그 처리 효율 자체가 굉장히 낮아져 버립니다. 따라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효율적이죠. 그만큼 아플 수도 있는 것이고 수치심(수줍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비슷한 메커니즘을 활용하기 때문이죠.
학자들은 혼자서 연구하는 시간들을 많이 투자하다 보니 조금 덜할 수는 있습니다. 공부하는데도 리비도가 투자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만족감도 듭니다. 제가 기억하는 정신과 병동 환자 중 한 분은 증상이 올라오면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종이와 붓을 들고 보호실에 혼자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안에서 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립니다. 그 그림도 또 멋있습니다. 증상으로 올라오는 것이 대상 리비도이니 그것의 승화를 통해서 안정을 찾고자 하는 것이죠.
애착 문제는 정신분석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배우면서 자아가 '형성'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에서 돌잔치를 하는 것도 아이가 언어를 배웠기에 드디어 인간사회로 첫 발걸음을 들였다는 축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말을 배우고 자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은 언제나 변화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애착이라는 개념은 그 변화를 일부 수용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게 만드는 합리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