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부러움과 시기심, 질투는 비슷한 감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요? 한번 구분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겁니다. 시기는 무엇이며 질투는 무엇일까요? 그 차이를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질투는 내가 가질 수 있는데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의 예는 쉽습니다. 흔히 남녀 간의 삼각관계에서 질투심이 잘 드러나죠. 이런 질투의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시기심이란 남이 가지고 있는데 내가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배우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화를 찍는 대가로 수억 원의 이익을 얻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데 저 사람이 하고 있기 때문이죠.
질투는 승화가 되지만 시기는 승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시기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람보르기니를 탄다고 내가 그것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좀 막연합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잊어버리기도 하자 먼 때때로 생각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질투는 승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생의 성적을 질투한다고 해봅시다. 질투가 승화가 되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합니다. 즉. 내 성적을 더 올리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승화가 이런 식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승화가 무조건 윤리적으로 옳지는 않거든요.
예를 들어서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반한 여성은 질투를 할 겁니다. 그 결과로 나중에는 아내의 자리를 뺏으려 합니다. 질투가 그렇게 승화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윤리적으로 굉장히 곤란한 지점을 품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기심은 SNS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최근 여성 연예인들의 잇따른 죽음에 대해서 악플러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한 시기심 대신 욕이라도 하는 것이었죠. 이런 시기심은 이성에게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동성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죠. 남성과 여성의 시기심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남성이 마동석 씨를 보고 자신의 시기심 때문에 욕을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대부분은 '맞을래?'라는 반응이 나올 겁니다. 이병헌 씨도 마찬가지로 연기로는 깔 수 없는 존재죠. 배우 초기 커리어에서는 조금 부족한 연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노력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예뻐지면 그걸로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보셨을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주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헛소문이 돌아다니기도 하죠. 직장 동료 병문안을 남자 동료와 같이 갔는데 둘이 데이트하더라는 식으로 남자한테 꼬리 친다는 말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무엇인가에 대한 시기심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질투한다면 오히려 애써서 자신도 예뻐지려고 노력하고 남자 친구도 사귀려고 애를 쓰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주어지길 바라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집니다. TV에서 등장하는 악녀가 예쁘다고 현실 악녀가 그렇게까지 예쁠까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설리 씨의 죽음에 대해서 다룬 것이 있습니다. 가수 설리 씨의 악플러는 여성이 99%라고요. 그 사람들의 시기심이 굉장했다는 거죠.
질투와 시기가 연약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존경심 혹은 경외심을 가질 때입니다. 여기서 경외심은 두려움의 한 종류이기도 하죠. 질투와 시기심은 그렇게 대상을 향한 동경으로 승화됩니다. 자신을 더 노력하게 하는 라이벌이나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위대한 사람을 보는 것과도 같죠.
예를 들어서 자신의 롤 모델이 누구인지 보는 것도 중요하겠죠. 세계챔피언을 15회나 방어한 장정구 선수는 어린 시절 김현지 선수의 권투 시합을 보고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에시들도 많죠.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닮게 되는 것이요. 여기는 동일시도 작용을 합니다.
어려서 사랑을 못 받아서 시기심이 많을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구하는 것이 과잉되어서 그렇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싶지만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시기심은 삶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면 시기와 질투는 많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는 또 싫은 마음이 듭니다. 체면의 문제가 들어가기도 하고 또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권력투쟁의 방식으로 전개가 되기도 합니다.
여성의 경우는 성 발달 과정에서 일어난 선택들도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습니다. 그 부분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아직 이야기할 수 있는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시기심을 자극하고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 행동을 엉뚱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즉, 내 친구가 좋아서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 그걸 엉뚱하게 해석해서 기분 나빠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여성 분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되게 예뻐서 남자들이 나만 만나면 사귀려 한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철저히 남자를 차단하거나 선별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과대평가하면서 다가오는 이성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동성에 대해서 또 친절하냐? 그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같은 여자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죠. 이런 경우에는 신뢰관계 형성이 굉장히 어려워지면서 스스로를 고립으로 밀어 넣는 작용도 합니다.
분석 장면에서는 질투의 의미를 검토합니다. 시기 역시 검토하죠.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도 추적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방어할 수 있게 돕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와 시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말리지 않습니다.
정신분석가는 질투와 시기가 일어나게 만드는 정신 장치 간의 리비도 역동을 검토합니다. 그 움직임을 살펴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것을 프로이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글을 읽다 보면 '정신과학'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정신 물리학'이라는 이야기도 하지요.
주체의 역동에 따라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능력은 시기 질투와도 관계됩니다. 시기를 하든 질투를 하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 있다면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질 수 없는데 막연히 질투하고 시기한다면 인터넷에서 보는 '악플러'와도 같아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질투하고 있다면 그것을 향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승화가 되죠. 그러나 시기한다면 노력을 기울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된다면 시기는 곧 사그러 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세요.
예를 든다면 운동을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국가대표 수준으로 운동할 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과를 소화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내야 비로소 이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