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감정과 열등감

망설임이 양가감정일까? 열등감을 정신분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by 박진우

양가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일한 대상에게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의 감정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 두 감정은 원래의 상태로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것들이 어느 정도 분리가 되어 있었습니다만 사춘기를 넘어서면서 하나의 형태로 들러붙어버립니다.


이러한 양가감정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망설임이나 열등감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무의식적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고요. 분석 장면에서 충분히 관찰이 되는 것이거든요. 이런 것들을 무조건 무의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무의식의 기본 대전제는 의식이 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융은 무의식이 혼자서도 의식화된다고 주장을 하긴 했습니다. 아마도 가끔 전혀 자신의 연상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재빨리 기록해서 분석하면 무의식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를 가졌을 것도 같은데, 그걸 한다고 무의식으로 접근은 안될 겁니다.




망설이는 '지연 효과'는 흔히 발생합니다. 강박증의 경우에 미루는 것이 굉장히 심한 경우도 있죠. 어떤 일을 끝내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작동하기 대문입니다. 이러한 정신작용에 대해서 스스로 방어를 하고 싶으면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처리하고 끝 마무리까지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작정 미루는 게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정신작용에도 도움이 별로 되지 않죠.


분석을 하면서도 대뜸 진행을 포기하고 멈추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석하는데 지친다는 이유로 말을 하죠. 혹은 도중에 연락을 끊고 그만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재발해서 찾아오기도 합니다. 저의 과거 내담자 한분은 분석으로 좋아졌다가 그만두고 더 심하게 재발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다시 증상 때문에 괴롭다고 찾아왔는데, 약을 먹는 것이 경제적이고 공부하는데 필요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치료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 만큼 억지로 분석해야 된다고 강요할 순 없었습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약물은 치료가 아닙니다. 단지 순간적인 기분 정도를 조율하는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약을 먹고 싶다는 주체의 소망을 거절하진 않습니다. 상담하면 다 낫는 것을 바라는 경우도 있는데, 종종 병들어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인간 욕망이 그래서 복잡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양가감정이 선택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양가감정을 두고 '양가적 가치'를 두고 있다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혹여나 사람들이 실수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의 문제는 양가감정과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사람들이 망설이는 이유는 완벽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완벽해지려는 충동의 존재는 융이 한번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완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그런 소망입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완전한 존재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존재가 인간이지요.


강박증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들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예로 영화 [플랜맨]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전형적인 강박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등장하는 강박증의 문제를 단지 완벽하려 한다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분석해본다면 전혀 다른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애도하지 못한 어린 마음이 그 증상에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생한 완벽주의를 겉으로만 봐서는 파악할 수가 없죠.



망설이는 것이 너무 길어지면 문제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런 경우에 '반복 강제'가 발생합니다. 자꾸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죠. 어떤 분은 매듭짓기를 포기하면서 자꾸만 지연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용사 자격을 따려고 미용사 실기에는 붙는데 실기를 치르지 않는 겁니다. 그 실기 합격도 몇 년간은 유지되는데 그 기간에도 실기를 치르지 않아서 다시 필기를 쳐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런데 다시 필기를 치고 또 똑같이 실기를 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미용사 필기 합격만 10년 반복하신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것의 원인을 아버지로부터 발생한 양가감정으로 둘러대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전혀 어울리지 않죠. 양가감정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는 것

이러한 내용을 양가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애증'이라고도 하죠.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강한 사랑과 강한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너무 엉뚱하게 말을 사용하는 바람에 꽤 개념 오해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열등감의 문제도 살펴볼까요? 다른 사람과 비교당한다는 것은 꽤 기분 나쁜 일입니다. 너는 왜 그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너는 왜 그렇게 생겼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매우 불쾌하죠. 그렇게 개인의 삶을 부정하는 말들은 그렇게 좋게 다가오진 않습니다. 재수 없는 느낌이 확 다가오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나의 이상(ideal)은 그런 것이 아닌데, 그런 것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함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그럴 때 나의 이상 자아는 나를 부드럽게 품어주려고 합니다. 환상 작용을 동원해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도와주려 하죠. 이러한 정신작용은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없습니다. 조건에 따라 그것이 지나치게 과해지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열등의식을 느끼게 되면 괴롭습니다. 아들러는 이런 열등감을 승화를 이끄는 힘으로 검토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핵심으로 삼았죠. 최근 화제였던 '용기'시리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도 했지만 프로이트는 그런 관점에 그렇게 찬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러는 외디프스 콤플렉스의 아주 작은 부분인 열등 콤플렉스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만들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러는 개인 분석학이 아니라 개인 심리학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은 전반적으로 의식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 후대의 학자들은 의식을 중시하는 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벼락부자가 되는 환상을 즐기고 굉장히 아름다운 미소녀가 옆에서 시중을 드는 환상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다소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죠. 현실은 시궁창. 그 말 그대로 우리의 현실에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잔뜩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견뎌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현실에 맞추어 생존하는 것이 자아의 기능이기도 하죠.


약간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월감과 열등감. 그것이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둘의 원천이 다릅니다. 우월감이란 그 원천이 나르시시즘에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감과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죠. 우월하다는 것은 자아에 힘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변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옳다는 것만을 주장하죠. 그렇다고 해서 나르시시즘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실수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기능 자체가 자아에 추가적인 힘을 공급해주고 흔히 말하는 자존감도 나르시시즘에 의해 살릴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즘 문제를 이야기하면 흔히 '성격장애'문제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임상보고서에서 나르시시즘이란 병명을 단 한 번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즉,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단일한 정신질환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자료를 조사해보면서 알았는데, 빌헬름 라이히와 같은 학자들도 나르시시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따로 글을 쓰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열등감은 그 원천이 자아에 있습니다. 현실의 가혹함에 의해 찌그러진 자아입니다. 현실을 잘 견뎌 보려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현실의 뭇매 앞에 무력해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정신 작용의 원천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면 같은 감정으로 여겨지는 것도 다른 작동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월감은 나르시시즘에 의해 철저히 보호받고 있는 자아가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기운찬 상태이기도 합니다. 지나친 열등감은 자아 이상에 의한 압박으로 등장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두 가지가 같은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작동 방식을 검토하면 전혀 다른 원천에서 출발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서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부모가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녀도 열등감을 느끼는 것으로 위험하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이때 느끼는 자녀의 열등감은 초자아 혹은 이상 자아에 의해서 찌그러지는 자아를 나타내는 것이죠. 부모의 열등감이 세대를 통해 전수된다고 하는데 그 말보다 자녀가 부모와의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거든요.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방식은 모두 제각각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자존감 역시 나르시시즘과 관계됩니다. 우월감과 자존감은 힘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차이는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말 종종 합니다. 그것은 현실에 의해 찌그러진 자신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사람이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현실에 의해 찌그러질 수 있으니 겸손함으로 그것을 사전에 방어할 수 있다면 자존감의 문제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검토하면 '병리현상'도 이것과 관계는 지어집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꼴리]에서 병든 사람의 현실인식이 일반인보다 훨씬 날카롭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죠. 대체 사람은 왜 병이 들어야 현실을 더 날카롭게 파악하는지에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열등감 자체를 치료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멋지고 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차은우를 보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면 김태희를 보고 열등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철저하게 관리되어 온 연예인들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을 '넘사벽'이라고 하죠. 그래서 그들이 가끔 시기의 대상이 됩니다.


여성의 경우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고 있음에도 외모 콤플렉스가 심하다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외모 비하는 신경증 징후로도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례로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여성이 외모가 되게 예뻤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수술까지 해서 훨씬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런데 거울만 보면 자기가 너무 못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성은 칼로 자기 얼굴을 자해해서 다시 수술할 것을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지만 신경증의 징후를 굉장히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감정이 정신분석적으로 따질 때는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과도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신경증 문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어떤 한 개념을 제시하면 그에 대한 탐구과정이 조금 복잡합니다. 정신분석을 위해서는 감정들의 구분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담인데, 라캉이 스피노자를 좋아해서 스피노자의 감정 도식을 사무실에 걸어놓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초기 논문에 대해서 상당히 강렬한 흥미를 가졌습니다. 제가 이 글을 시작하고 [충동의 운명]이라는 논문을 라캉이 극찬했다는 것을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글 역시도 굉장히 체계적입니다. 즉, 처음 읽을 때는 어려운데 임상 이미지만 잡을 수 있다면 완벽한 하나의 설명서처럼 읽히는 논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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