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나르시시즘
어린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 짓는 벽이 얇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듣기에 이상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경우, 특별하지 않다면 정상이라고 봅니다. 이차성징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경증의 발병이 드물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틱 장애와 같은 것이 어린 시절에 발병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유년 신경증으로 설명이 됩니다. 이러한 발달단계 문제를 고려할 때, 조현병과 같은 정신병은 어린아이에게 등장할 수 없습니다. 남근기에 발달한 나르시시즘이 억압을 거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야 정신병이 발병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은 진단에도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적인 차이는 정신의학의 진단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형적인 강박증이 아니고서야 동일한 진단명이 나오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최근 사춘기가 빨라져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가 되면 이차성징이 등장하고 신경증 징후가 보이는 경우가 종종 관찰됩니다. 신경증은 주로 이차성징이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해서 굉장히 애매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즉, 체모가 나는 무렵에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확 발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활 질서가 변하는 것이 발병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정신분석 서적을 종종 읽으신 분들은 자아 이상과 이상 자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둘 다 ideal이라고 씁니다. 프로이트에서는 양심 기관 정도로 구분이 좀 애매했습니다. 라캉에 와서 확실하게 구분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상 자아를 쉽게 이야기한다면 세상에서 <내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 것을 때로는 실낙원으로도 묘사합니다. 자신에게 환경을 맞춰달라는 요구가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자아 이상이란 자아가 추구할 이상향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나르시시즘이 투사되어서 만들어집니다. 흔히 말해서 정상적이다 혹은 아주 잘 되어 있다는 그런 모습입니다. 흔히 말하는 자존감이 높은 이미지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흔히 자존감이나 자존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심리학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내용일 때는 자존감으로 구분하고 내용이 부정적이면 자존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이나 자존심이나 그 근원이 모두 나르시시즘에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상황을 잘 보면 그 사람의 나르시시즘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자존감에 작은 흠집 하나만 생겨도 견딜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상황에서 자기 이상에 맞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이 작용합니다. 체면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남근기 말기에 나르시시즘이 발달하면서 동성애 리비도도 함께 발달합니다. 동성애 리비도 역시지 3자를 향하는 대상 리비도입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와 닮은 사람을 향하는 것입니다. 동성애 리비도도 여러 가지로 작동합니다. 자아 이상의 형성과 이상형을 보존하려는 노력과 관계됩니다. 동성애라는 방식으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이상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장해서 동성애 리비도의 작동이 투사로 이어지면서 편집증으로 발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승화되는 경우 사회적 감정이나 철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신병리에서 등장하는 환청은 이 것이 퇴행되면서 양심의 목소리가 타인의 목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편집증으로 발달한 경우, 양심의 목소리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꼬여서 불특정 다수의 목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검열에 대한 반항도 일어납니다. 편집증의 특징적인 부분으로 초자아가 되려고 한다거나 새로운 초자아를 건설하고자 시도합니다. 양심은 투사로 옮겨지면서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들이 나와 관련된 것이고 나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의식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비난과 핍박하려고 하는 피해망상으로도 진행합니다.
프로이트는 자의식 탐구나 자기 관찰을 통해 어떤 이론을 만들고 체계화시키는 능력을 철학의 기능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메타 심리를 연구하면서 철학은 정신분열구조에 속하고 종교는 강박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르시시즘 서론을 쓰던 1914년에는 주로 편집증 문제를 다룹니다. 물론 당시 프로이트는 편집증과 분열증 그리고 조울증까지 이상 정신으로 한 가지 틀에서 묶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임상적 관찰로는 주로 편집증의 문제에 한정됩니다. 이 것은 후대 분석가들에 의해서 탐구된 내용입니다.
미지의 영역에서 앎을 깨달아가는 초기 과정이나 평소와는 다른 전제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있을 때, 그 충동력이 너무 강하고 신체가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면 편집증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라캉은 인간의 모든 인식에는 편집증적 요소가 있다 라는 말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리만 가설과 같은 어려운 연구를 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연구 충동을 견디지 못해서 편집증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정신의학에서 종종 위인들의 생애를 adhd로 홍보하는데, 그때도 이런 내용이 관찰됩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adhd 같은 진단명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 현장에서 나르시시즘과 관련된 현상들은 종종 관찰됩니다. 나르시시즘이 강한 내담자의 경우에는 전이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덕분에 분석의 영향력이 잘 들어가질 않습니다. 정신병의 경우 흔히 말하는 긍정 전이와 부정 전이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정 전이가 상담에 방해가 되는 요소이긴 합니다. 상담사 싫어하는 태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것조차 일어나지 않을 때는 더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시를 들어보죠. 편집증 내담자를 분석하고 나면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합니다. 편집증자들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나고 분석 처방이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석 처방이 있다고 하더라도 잘 듣질 않습니다.
조금 다른 예시로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정신과 병동에서 보호사로 근무할 때, 어떤 노부인이 복통을 호소해서 외진을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정신과에서 내과를 전문적으로 보지는 않으니까요. 그 부인은 조현병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임상을 관찰해보니까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편집증적 요소가 다분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라 그런 식의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처음에는 다들 단순 복통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료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병원 직원이 스피커폰으로 진료 결과를 들었습니다. <간암>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보통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큰 좌절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편집증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렇지 암. 간암 증상이 있지>그리고 일정 감정적 동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전이가 되지 않으니까 그저 그런 말만 들은 것입니다. 전이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입니다. 그러나 편집증 구조에서는 가능합니다. 자아와 나르시시즘이 연합해서 초자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초자아가 자아에게 어떤 명령을 해도 꿈쩍하질 않습니다. 나아가서 자아가 스스로 법이 되고자 하고요. 충동의 구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충동 역시 그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분석 치료가 아니라면 큰 쓸모는 없습니다.
자아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생존에 있습니다. 따라서 생존하기 위해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이 것을 두고 자아 충동이라고 부릅니다. 자가 이득 혹은 관심을 뜻합니다. 이때의 관심은 주변에 대한 관찰도 포함합니다. 순수 자아 충동에서는 주변 상황을 관찰하고 현실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습니다. 편집증이 발병하게 되면 이 순수 자아 충동이 파괴됩니다. 철학에서도 이 순수 자아 충동이 종종 이야기됩니다. 예를 든다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같은 경우, 자기 보존 충동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향하는 충동을 두고는 성충동이라고 합니다. 성 충동이 있다고 해서 섹스만을 노리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 여자 사이의 대화에도 리비도가 들어갑니다. 이 것은 외로운 사람들이 이성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과도 관계됩니다. 어떤 단체에서 활동하다 보면 이성을 찾는 사람들도 꽤 됩니다. 혹은 인터넷에서도 그런 태도가 보입니다. 랜덤채팅도 그렇지만 과거에 순수하게 대화방이 운영되는 경우에도 여자들이랑 채팅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정신병리에서 나르시시즘이 강하면 행동상의 이기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의 이기주의는 타인을 무시하는 윤리적 이기주의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자아가 생존하기 위해서 자기 보존 충동이 작동해서 행동을 아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이런 내용을 현실 회피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아가 안정되기 위한 자기 보호 행동으로 간주합니다.
조금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편집증에서는 강박증이 자가 치유적인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분열증에서는 히스테리가 자가 치유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정신병의 자가 치유 방식이 신경증으로 드러난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망상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편집증의 망상은 확신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합니다. 병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분열에서는 자기 세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신체적인 신호를 계속 보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히스테리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다루는 좌표가 바뀌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리비도를 철회할 때가 있습니다. 잠이 들 때 리비도가 철회됩니다. 그렇게 자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은 전형적인 나르시스 리비도 투자입니다. 꿈을 꿀 때 자아는 정신병적으로 만족합니다. 정신병에서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식이 환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환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환상을 즐기는데 거기서 다시 환상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퇴행이 일어나서 다시 퇴행을 거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좌절한 리비도가 나르시시즘으로 다시 돌아와서 처리하는데 환상 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환상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망상이 그 처리를 대신해버리기 때문이기도 하죠.
물론 환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나르시스에 리비도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마약을 복용하게 되면 환상과 관계없이 이런 자극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작용을 일상적으로도 받습니다. 제 내담자 한 분은 어릴 때부터 혈관성 두통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분석 과정에서 그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심리적 변화는 없었습니다. 다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처방받았던 비염약에 들어있던 슈도 에페드린과 스테로이드 약물이 나르시시즘에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단순히 약물 부작용 아니냐?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통증이 약물 복용 직후에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과 더불어서 심리적 변화도 어느 정도 수반하고 있었습니다. 즉, 대상 리비도가 작동할 때는 괜찮았는데, 약물이 들어가면서 리비도 처리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신체는 대상 리비도를 처리하는 방식을 다시 복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체 통증으로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주체가 리비도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자가 치유 방식입니다.
정신분석에서는 히스테리를 다룰 때, 의학적인 내용도 어느 정도 고려를 해야 합니다. 히스테리가 발병해서 통증이 생기면 그 병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심리적인 원인으로 인해서 신체적 손상이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기 분석가들은 이런 경우를 두고 식물 증상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상에게 투자되는 리비도는 대상 리비도, 자아에게 투자될 때는 자아 리비도라고 했습니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이 리비도 차이를 통해서 구분이 지어질 수 있습니다. 신경증은 대상 리비도의 과잉입니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일어납니다. 현실에 투자한 대상 리비도가 너무 많아 좌절된 리비도가 다시 내향화 되면서 발생합니다.
정신병에서는 자아 리비도가 과잉되어 있습니다. 환상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서 지각된 것들 그대로 체험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자기 지각이라는 말을 씁니다. 치료는 이 과잉된 리비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리비도는 언제나 불균형합니다. 마치 세포질 내의 나트륨이 불균형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러한 불균형한 리비도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특권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상 리비도가 과잉되면 자아 리비도를 획득하라는 압력을 보냅니다. 이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리비도를 스스로에게 투자합니다. 너무 심하면 집에서 나가지도 않습니다. 신경증의 일반 충동은 건강보다 병을 선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염려증>의 사례는 이 내용을 잘 보여줍니다. 특징적으로 <고통감>이 있지만 <고통>이 없습니다. 증상이 시작되면 관심과 리비도를 철회해서 자신의 신체에 투자합니다. 그러면 리비도 정체가 일어나고 그 부위에서 통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히스테리가 그렇게 발병합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모든 신경증에서도 관찰될 수 있습니다. 정신병에서도 두드러집니다. 편집증의 경우, 건강염려증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병이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망상이 형성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이런 태도도 나타납니다. 아무리 검사를 해도 자신의 병을 찾지 못한다면 <현대 의학이 발견할 수 없는 병에 내가 걸렸구나…>라고 믿습니다.
신경증은 대상 리비도의 과잉입니다. 이 것은 때론 공포증의 형태를 가집니다. 주체의 연상에 의해 이어지는 내용이 과잉된 리비도를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변에서 이성 공포증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계가 됩니다. 과잉된 대상 리비도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 방식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성을 만나는 것으로 불안해한다면 사람이 초조해지고 조마조마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속에 깃들어 잇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리비도의 정도를 스스로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비도가 지나치게 되면 그 나머지를 감당하기 위해서 합리화를 해야 합니다. 마치 컴퓨터가 셧다운 되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이성을 만나면 꼼짝없이 얼어붙어버립니다. 스턴 된다고 해야 되겠군요. 의식에서는 이런 상태가 고통스럽습니다. 증상은 이런 방식들로 형성되니까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합니다.
이 것은 물리적인 특징을 조금 지닙니다. 양의 문제가 적용됩니다. 정신분석에서 리비도라는 말을 쓸 때는 언제나 양의 문제를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관점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쾌-불쾌의 원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긴장이 양적으로 증가하느냐 떨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쾌락이란 긴장이 낮은 상태입니다. 불쾌에서는 긴장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긴장이 낮은 상태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쾌락을 성적 흥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