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아카데미에서 강의한 내용
파도 손 강의를 마친 다음날, 바로 서울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철학 아카데미 같은 경우는 교수님들도 강의를 듣고 계셔서 조금 위축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이다 보니 라캉 쪽에 관심이 많으셔서 정신분석에도 관심이 꽤 있으신 분도 많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곳에 설 수 있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온라인으로 정신분석을 진행하는 <디지털 정신분석>이란 기법을 발견한 박진우라고 합니다.
제가 이 강의 제목을 [나르시시즘의 도입과 정신병]이라고 한 것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서론을 토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정신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 개념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은 여러분들께 기본적인 정신분석의 틀인 욕망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내용이라서 실망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여기 참석하신 분들 중에서는 정신분석을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욕망 기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 책에서 들뢰즈는 인간 주체를 두고 [욕망 기계]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 내용은 들뢰즈라는 학자가 프로이트에 대해서 얼마나 정통했는지 생각하게 해 줍니다. 욕망 기계라는 말은 욕망을 중심으로 정신이 기계처럼 작동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에 대해 처음 배울 때, 프로이트의 인간관을 두고 <기계론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기계처럼 작동한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정신 결정론>이라는 말도 있어서 마치 인간의 삶이 결정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잘 모르는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두고 <점쟁이>라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계론이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더 심층적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프로이트는 정신 장치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생소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자아, 초자아, 이드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정신의 작동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프로이트가 만들었습니다. 이런 구조를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 에너지가 들어가니까 어떤 결과를 낸다는 말입니다. 정신 결정론이라는 말도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현상이 있을 때 정신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은 자연보다 더욱 엄격하게 인과관계를 따집니다.
우선 자아, 초자아, 이드는 어떻게 알려져 있을까요? 초자아는 자아를 감시하고 명령합니다. 마치 근엄한 아버지처럼 비유합니다. 이드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자아에게 마구 요구를 합니다. 그리고 자아는 이 두 요구를 조율해서 현실을 다룹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프로이트의 개념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비유로는 정신 장치의 개념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정신이 기계처럼 구성이 되어 있다면 작동하기 위해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조로는 신경증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초자아가 감시하고 명령한다. 자아가 현실원칙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맞습니다.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드가 마구 요구만 하는 어린아이로 바뀌면서 에너지 공급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초자아와 자아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에너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 역할을 이드에서 합니다. 이드가 모든 정신 장치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기능에만 몰두하다 보니 이런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드는 초자아에도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미지에서 초자아와 이드는 마치 반대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드 역시 에너지 덩어리라서 그 압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요구로 엉뚱한 해석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걸 초자아가 반대하기도 하고요.
이드는 초자아에도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뒤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두고 <야합한다>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다소 정치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서로 갈등관계에 처해있지만 뒤로 돌아서면 후원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덕분에 대학에서 정신분석을 배우고 곧바로 실생활에 접목하려고 정신 장치들의 특징을 따서 주변 사람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연애 문제에 들어가면 자기 연인이 초자아가 강하다 혹은 이드가 너무 강하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처럼요.
이드와 초자아 간의 야합 관계를 생각한다면, 초자아가 강하기 위해서 이드 역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단순화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맥락을 가끔 무시합니다. 에너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말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성욕이라는 의미를 들이대는 덕분에 거부감 느끼시는 분들이 꽤 많죠. 학생들도 그렇지만 전문가들도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반감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리비도를 섹스 차원으로만 생각할 때, 큰 오해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 차원을 삭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가 유아 성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섹스 차원만 고려해서 프로이트를 변태로 몰아붙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도 리비도를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정력>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성과 관련된 내용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생각과 다르게 정력이라는 말에는 <활동성>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리비도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리비도를 <사랑 능력>으로 씁니다. 리비도는 주체적으로 사랑하고자 할 때 나타납니다. 그 맥락에서 성욕의 문제를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른의 성욕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등장합니다. 어른은 어른의 방식으로 사랑합니다. 유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아도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자 할 때 리비도가 투자됩니다. 사랑하고 싶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맥락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해가 곤란해집니다. 단독으로 나르시시즘을 이해해버리면, 즉 나르키소스 신화를 토대로 해서 이해해버리게 된다면 정신분석 개념에서는 큰 오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을 연구하게 된 것은 정신병과 신경증을 보다 명확하게 구분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정신병을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이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융과 같은 동료 학자들의 연구에서 정신병에 나타나는 전이가 보고 되고 그 이후에 프로이트도 실제 편집 증자의 꿈을 분석하다가 전이를 발견합니다.
어떤 편집증자가 면도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비누향을 느꼈습니다. 그 편집 증자는 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면도를 안 했습니다. 그 냄새의 출처를 찾아보니 프로이트의 비누향이었습니다. 이 꿈을 분석하고 프로이트는 정신병에서 발생하는 전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편집증적 전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발견 사실이 있음에도 종종 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정신병에는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가들이 있습니다. 정신의학의 영향으로 정신분석이 잘 되지 않는 몇 가지 정신질환을 규정해놓기도 했습니다. 이 것들이 조현병이나 혹은 조울증에서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런 태도는 영국과 미국에서 형성된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정의하는 편입니다. 나르키소스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자기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자기애를 이해합니다. 덕분에 그런 방식으로 단순한 이해를 선 호합 닌다. 그래서 생겨난 오해가 셀카 찍는다던가 자기 관리에 나르시시즘을 의미를 부여합니다. 자해와 같은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조언을 많이 합니다. 너무 자기 자신만 알면 또 나르시시스트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의 성과만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고요. 그래서 비하의 의미로 많이 사용합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라는 정신의학적 진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의 의미가 이렇게 변질된 이유는 프로이트 이후의 학자들이 프로이트의 기계론을 잘못 받아들여서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도 있습니다. 집단 심리의 분석에 뛰어났던 빌헬름 라이히나 양육 전문가로 알려진 하인즈 코헛과 같은 학자들도 이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라이히는 나르시시즘의 의미를 두고 <자존감을 조절하지 못하는 병적 형태>라고 개념화했습니다. 코헛은 <유아기에 엄마의 공감 실패가 자아의 결함을 가져와서 나르시시즘을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대상관계 이론가들은 양육자의 어린 시절 관계 결함이 나르시시즘 문제의 근원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병리적인 방향으로만 추구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관점 자체가 삭제된 것이기도 합니다. 정신은 구조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르시시즘도 거기에 개입하는 하나의 정신 장치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증상을 설명하는데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미파 분석가들이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 정신질환을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다시 되돌아가 봅시다. 나르시시즘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설명했지만 오늘은 정신병에 대한 내용이므로 부수적인 내용들은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 나르시시즘을 두고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이성의 몸처럼 애무하고 자위행위도 합니다. 동성애라고도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가치롭진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두고 개인의 성생활을 빨아들이는 변태증 과다를 바가 없다고 씁니다. 물론 나르시시즘 서론을 읽어보신 분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번역은 [개인의 성생활을 황폐하게 하는 성도착과 다를 바 없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사족을 덧붙인다면 도착의 경우는 inversion이라고 따로 용어를 씁니다. 국내에서 주로 도착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하는데 그 말이 pervesion인 경우가 있습니다. 도착이라는 의미는 동성애에 한정되는데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경향이 다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프로이트를 읽으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르시시즘에는 근원적 나르시시즘과 고유한 나르시시즘이 있습니다. 서로 1차 나르시시즘, 2차 나르시시즘으로 이야기합니다. 정신분석에서 나르시시즘을 그냥 이야기할 때는 2차 나르시시즘입니다. 이런 구분 없이 얼핏 들으면 같은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차이를 이야기한다면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자가 성애> 단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자가 성애> 단계에 있는 어린아이는 자아가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단계는 동물에게서도 관찰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언어를 배운 이후에 모자이크처럼 발달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나타나고 발달이 진행되면서 대상의 통일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엄마>역시 자라면서 하나의 통일된 대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흔히 말하는 분리 개별화 단계 등의 발달단계를 이야기합니다. 그 발달의 정도가 자아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카오스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남근기를 지날 때 대상의 통일 운동이 격렬해지고 고정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대상 선택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 몸만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가 성애죠. 자기 몸 대상의 일부인 부분 대상을 애무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을 때는 자기 몸의 애무가 더 활성화됩니다. 성장해서도 간간히 등장합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복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대상 리비도가 발달합니다.
남근기 말기에 들어서야 나르시시즘의 형성이 시작됩니다. 이때 환상도 발달합니다. 이러한 발달 순서가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자가 성애로부터 시작해서 대상 리비도가 발달하고 그 이후에 나르시시즘이 발달합니다. 이 점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