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질문, 프로이트의 답변
* 얼마 전에 영상으로 제작했던 내용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오늘 글에서는 ‘왜 전쟁인가?’라는 프로이트의 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합니다. 이 편지는 아인슈타인이 프로이트에게 반전운동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지만 프로이트가 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번 시간에 이야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실 때 본능으로 쓰인 부분은 모두 충동으로 고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좀 혼란스러운 것이 ‘본능적 충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충동 목표라는 말로 읽으시는 것이 훨씬 읽기가 편하실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공격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제가 저번 시간에 집단 심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베이스로 해서 들어두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쟁에도 집단 심리의 영향이 들어가니까요.
아인슈타인의 질문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증오와 파괴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이 열정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겉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열정을 자극하여 집단 정신병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이 말은 아인슈타인 역시도 집단에 대해서 프로이트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이어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어나는 충돌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잔인하며 가장 낭비적인 국제 분쟁을 강조하는 것은 ㅇ의도적인 행위였는데 여기서 모든 무력 충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법과 수단을 발견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반전운동에 함께해주면 더 훌륭한 방식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겁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답장을 보냅니다. 아인슈타인의 질문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다시 보니까 좀 의미심장한 말이 있네요.
우리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여 결국 같은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분야의 문제를 기대
한다고요.
프로이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물리학적 법칙을 통해서 정신작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 물리학자가 그런 질문을 던져주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면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무척 즐거운 일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전쟁의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학자로서의 질문이 아니라 박애주의자로서의 질문을 던진 것이죠. 그런데 프로이트도 여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말이 없는 상탭니다. 즉, 아인슈타인의 의견에 말을 조금 더 덧붙여주는 것 정도만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반 원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물계 전체와도 마찬가지죠. 즉, 힘센 놈이 많이 차지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런데 충동의 성질을 따라 본다면 동물보다는 인간이 좀 더 하죠. 동물은 자기 필요만 채우면 정지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것이 ‘충동’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원래는 근육의 힘이 이해관계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요. 성능 좋은 무기나 숙련도가 승자가 되었습니다. 무기가 있으면서 지적 우위가 힘을 대신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거죠. 그리고 폭력으로 상대를 완전히 짓누를 수 있으면 두 가지 이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보기가 되는 거죠. 승자에게 다시는 반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적을 죽이는 것은 충동 성향도 만족을 시켰습니다. 포로로 잡으면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시겠지만 패배한 적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복수심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프로이트는 논리를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이 폭력에 대해서 약자가 강자에게 겨룰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폭력은 단결로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죠.
폭력은 단결로 압도할 수 있고, 단결한 사람들의 힘은 이제 한 사람의 폭력과는 대조적으로 법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의가 공동체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언제 든지 사용될 수 있는 폭력입니다.
그리고 이 폭력에서 새로운 정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심리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다수의 단결이 안정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공동체가 지니는 폭력이 억제력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역사적인 발달사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하면서 현대로 넘어옵니다.
그래서 인류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판결할 권한을 가진 중앙 권력 기구를 설치하는데 협조해야만 전쟁을 확실히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최고 결정 기관이 있어야 하고 또한 기관이 필요한 권한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권한이 없는 기관은 쓸모가 없죠.
프로이트 당시의 국제연맹은 고유한 권한 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NATO 같은 기관들이 있죠. 그러한 기관이 있어야 전쟁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고요.
공동체를 단결시키는데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적 유대입니다. 물론 이 두 요소중 한 가지가 결여된다고 해도 공동체는 단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주의적인 마음에 호소할 때, 그것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 중요한 유사성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이상주의적인 마음은 한 가지의 신념, 사상이 되겠죠. 그것들이 집단을 구성하게 되니까요.
프로이트는 이 편지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적 사고방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을 것으로 예언하곤 했습니다. 정신분석 학자 중에서도 이런 말 한 사람이 있었죠. 슬라보예 지젝이 한때 ‘공산주의는 승리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그 말이 자신의 철학적 연구에서부터 온 걸로 알았는데… 여기서 나온 거였네요. 역시 프로이트 주변에는 떨어져 있는 게 많습니다.
자 그리고 이후에 프로이트의 충동 이론을 전개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전쟁의 광기에 인간이 휩쓸리기 너무 쉽다는 것을 알고 나서 생긴 것이죠. 이 파트를 읽으시는 분들은 본능을 충동으로. 본능적 충동을 충동 목표로 고쳐서 읽으시면 더 좋을 겁니다. 독일어 tribe는 충동입니다. 이것은 본능 instict와 전혀 맥락이 다른 단어입니다. 그리고 본능적 충동으로 번역된 것은 독일어 Triebziele입니다. 독일어 tribe과 zielen의 합성어로 충동 목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리비도 이론을 소개합니다. 리비도를 양적 측면으로 설명할 때는 ‘리비도’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리비도의 질적 측면을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소개합니다.
첫 번 째가 에로스라고 불리는 삶 충동입니다. 보존과 통합을 추구하는 충동입니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사용한 에로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쓰는 것이고요. 또는 성 충동 역시도 이 에로스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충동을 공격 충동 혹은 파괴 충동으로 분류했습니다. 죽음충동이죠. 죽음 충동에서 파괴 충동 같은 걸 이야기할 때, 주의해서 보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 파괴하는 것은 ‘자기 파괴’입니다. 죽음충동 자체는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파괴하고자 합니다. 거기에 있어서 이념적인 이유를 대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푸틴의 파괴적 욕망에 대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프로이트는 전쟁 방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파괴 충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죽음 충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죽음 충동은 죽으려고 하는 것보다 무생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 생명 충동은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죽음 충동 관련해서 공격성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오해하시면 곤란한 것이 죽음 충동에서 파괴되는 것이 대상이라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죽음 충동으로 파괴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죽음충동은 리비도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공격하고자 하는 행위에는 리비도 운동이 들어갑니다. 리비도가 아니라면 투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구 상의 어느 지역에서는 자연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풍부하게 제공해주고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평온한 생활만 영위하고 강제나 공격은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 말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 비유하는 게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모든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겠다고 장담하고 그 밖의 다른 문제에서도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공격성을 제거할 수 있다고요. 프로이트가 보기에 이건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그 당시 강력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단결을 위해서 자주 활용하던 것이 국외자들을 위한 증오였었습니다.
이 점에서 푸틴은 실패라고 봐야겠네요. 러시아 군인들이 우크라이나를 미워할 이유가 딱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또 러시아 군인들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에 가족과 친구가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쪽을 억지로 공격하고 싶진 않죠. 푸틴이 그렇게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그래서 프로이트는 공격 충동의 완전 제거가 불가능하니까 전쟁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애쓰자고 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인간이 전쟁에 기꺼이 호응하는 것이 충동의 결과라면 파괴 충동의 적수인 에로스로 하여금 거기에 저항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때의 파괴 충동에는 ‘미움’이라는 속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감정적 유대를 이끌어내자고 합니다. 종교와 같은 것으로 유대감을 가지거나 동일화하는 겁니다. 감정을 일치시키는 거죠.
이러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프로이트는 이 편지의 전체 내용을 단 한 문장에 모두 압축시켜버립니다. ‘문명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동시에 전쟁을 억지하는 작용도 한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즉. 전쟁을 통한 문명의 발달이 동시에 이후에 일어나게 될 전쟁 억지력을 발달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데 있어서 세계가 러시아에 대한 제제를 하고 있습니다. 즉, 일방적인 폭력이 발생했을 때 국제사회가 하나로 연대해서 폭력을 유지할 수 없게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러시아에 여러 가지 압박이 들어가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멈추지 않아서 문제지만요.
저는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의 결과로 우리 국제사회에서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억제될 것인 것 한 단계 더 발전하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