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을 듣다
나이트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혜연 씨가 거실에 나왔다. 그런데 간호사실 문 옆에서 기웃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가서 직접 물어보았다.
“수면제 필요하세요?”
혜연 씨는 나의 질문에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 방에 있는 여자들이 내 귀를 빨았어요. 엉덩이를 핥고... 뼈가 부스러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잠이 들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사용한 말에 관심이 갔다. 망상은 아무나에게 이야기되기가 힘들다. 의사에게도 망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보여준 망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 같다.
혜연 씨의 말은 동성애 충동 문제를 떠올리게 했다. 리비도 충동은 다양한 분화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가 성 충동이고 두 번째가 동성애 충동이라고 부른다. 이 동성애 충동은 대부분 승화를 통해 우정이라는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수다스러운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 충동이 승화되지 않고 마치 성충동처럼 기능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신경증을 동원할 수 있다. 그것을 프로이트는 편집증으로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편집증 발병을 동성애 충동의 방어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논문 <정신분석 이론에 맞지 않는 편집증 사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성의 편집증 역시 동성애 충동의 방어이다.
어쩌면 혜연 씨가 잠에 들기 직전에 잠시 그 내용들이 의식에 잠깐 올라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자를 과도하게 좋아하는 태도가 그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혜연 씨가 나를 자꾸 쳐다보는 행동은 자기 내면의 동성애 충동을 부정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병과 스스로 싸우기 위한 방식을 찾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선택된 것이라면 주변에서 아무리 막아도 행동은 멈출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여성들 중에서는 남성들과 함부로 잠자리를 가져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이겠지만 주체의 입장에서는 강제로 부추겨진 일이다. 마약 중독에 빠진 여성들 역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약물로 인해서 자기 몸을 막 굴려도 그 행동에 자꾸 끌리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신경증 자체를 과도한 자가 치유 활동으로 검토한다. 주체에게 필요한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이 병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병이나 약물로 철회된 리비도 활동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런 움직임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임상 내용도 분석 현장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혜연 씨는 그 뒤로도 나에게 가끔씩 자기 망상과 같은 것들을 지나가는 말로 건네기도 했다. 여전히 간호사들은 나와 혜연 씨가 마주치는 걸 감시하듯 보고 있었다. 나는 의도치 않게 감시당하는 기분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그날 밤의 그 대화 이후로 혜연 씨의 행동에서는 변화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무척 유의미했던 것 같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어떤 환자들은 가끔 옷을 벗고 병원을 뛰어다니기도 한다. 온라인에서 옷을 탈의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보도하는 것처럼 전라의 상태로 돌아다니고 난동 부리는 기사를 접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혜연 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혜연 씨는 옷을 모두 벗은 채로 병동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속옷까지 벗고... 당연히 수간호사는 그런 혜연 씨를 보호실로 보냈다. 남자 환자들도 있는 병동에서 그런 행위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박 보호사. 혜연이 2PR 하고 2시간 후에 풀어줘”
나는 PR끈을 가지고 혜연 씨가 있는 보호실로 향했다. 묶을 때는 고통스럽지 않게 묶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신체를 고정하는 것이 진정하는데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 물론 정신병원 직원들의 보수교육 같은데서는 사지 강박에 의한 사망사고를 이야기하지 않는가?
보호실에 들어가니 혜연 씨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손을 묶어야 한다고 하니 별 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누웠다. 묶는 동안에도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간호사도 라운딩 중이었다.
“혜연 씨”
“네?”
말을 걸어준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혹시 페미니스트들의 슬럿 워크라는 걸 들어본 적 있으세요?"
페미니즘으로 유명한 대학을 나온 사람이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 그거 몰라요. 뭐예요?"
"미국에서 한 사회운동인데 페미니스트들이 상의를 탈의하고 단체로 시위하는 거예요. 떼쓰는 거랑 큰 차이는 없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나 떼쓰는 건데..."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말 보다 행동이 호소력이 짙기 때문이다. 그것을 번역할 수 있다면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정신분석은 그런 측면에서 '번역'과 같은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나는 혜연 씨의 손목을 굉장히 헐겁게 묶었다. 굳이 강하게 묶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혜연 씨는 그 자세 그대로 누워서 2시간을 버텼다. 그날 이후, 혜연 씨는 속옷까지는 벗으려 하지 않았다. 행동 자체가 번역이 되었다면 행동의 강도는 약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사건이 우연하게 일어나서 내가 과도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혜연 씨는 이후에도 그와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동시에 약간의 변화들을 보였다.
그 사건이 지나고 며칠 뒤, 나는 근무시간에 잠시 짬이 나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같이 담배 피우던 분이 흡연실을 나가자마자 혜연 씨가 들어왔다. 나는 즉각 흡연실을 나가려 했다. 괜히 같이 흡연하다가 핀잔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연 씨가 몸으로 문을 막았다. 밀어낼 수도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그러고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나의 생식기에 쥐똥을 넣었어요. 그래서 저는 에이즈에 걸렸어요. 아버지의 타월로 씻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리 엄마... 세상에 그렇게 지독한 여자가 있을 수 있나... 악!"
"혜연 씨! 문 열어요!"
간호사였다. 바깥에서 문을 열려고 했지만 혜연 씨는 버텼다. 뭔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자기 망상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문은 열렸고 나는 간호사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수간호사는 나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박 보호사! 그러다가 성추행이라도 발생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런 내용에 대해서 예민한 것은 어쩌면 과거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래의 성추행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마 혜연 씨의 월등한 미모 덕분에 내가 홀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을 것이다. 하기사 그런 소설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야단을 맞긴 했으나 망상을 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정신병적 망상은 쉽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관계를 쌓아가야 들어볼 수 있는 내용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얼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것은 한편으로는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혜연 씨의 말을 기록해두고 퇴근하고 집에서 프로이트를 펼쳤다. 쥐 인간과 슈레버, 꼬마 한스를 읽었다. 프로이트를 읽을 때 임상을 중요하게 관찰해야 한다. 물론 그 당시 내가 읽던 프로이트는 스승께서 손수 교정하셨던 것이다. 혜연 씨가 보여주는 내용들에 대한 단서들은 프로이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자서전을 분석하면서 일반인과 편집증에서의 언어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망상에서 활용되는 언어는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혜연 씨가 사용한 언어들에 대해서 접근해보자. <쥐 똥>이란 말이 관심을 끌었다. 신경증을 상징하는 동물은 문명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한다. 융도 나중에 이런 것을 관찰해서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그런데 쥐는 유독 강박증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혜연 씨의 증상에 강박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말로 여겨졌다.
똥이라는 말도 그렇다. 강박증의 고착점인 항문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단순하게 강박증적 언어 표현으로만 따진다면 너무 단순할까? 재미있게도 꼬마 한스 사례를 읽다 보면 <똥 막대기 lump>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유아가 직접 성에 대한 이론을 고안하는 유아성 이론을 통해 등장한 내용으로 5살이 채 되지 않았던 한스가 성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만든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생각에 아이가 나오는 곳은 배꼽이나 항문 등의 ‘구멍’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특히 똥이란 아이가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초의 생산물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교환 개념이 이때 형성된다. 그런데 엄마가 생식기에 쥐 똥을 넣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마에게 준 선물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해야 할까? 어떤 검토 과정이 필요할까?
똥 막대기라는 내용에는 팔루스(남근)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엄마도 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여자는 남근이 없다고 프로이트가 말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릴 하는 것이니 넘어가자. 어린아이는 나중에 엄마의 남근이 배속에 숨겨져 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이 내용은 ‘팔루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엄마를 향한 동성애 충동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 충동을 방어하기 위해 무엇이 등장한 것일까?
혜연 씨의 말과 행동은 병동에 갇혀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병에 투쟁하는 신호라 생각되었다. 나에게 집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자기 증상과 투쟁할 다른 방법들을 찾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말은 더 중요한 대체물이 생긴다면 집착적인 태도가 즉각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쥐 똥에 이어서 등장한 <에이즈>는 어떻게 검토해야 할까? 성관계 경험이 전무하다 해도 에이즈 감염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길에 뱉어놓은 침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있어서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믿음도 생긴다. 과학과는 전혀 다른 엉뚱함이지만 실제로 그 믿음을 지닌다.
이는 여러 가지 내용을 생각하게 해 주지만 하나만 꼽자면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운 강력한 성충동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때 리비도 합리화라는 방식으로 공포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결국 엉뚱한 믿음에 대한 자기 방어로 등장하는 것이다.
에이즈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도 생각해볼 만했다. <아버지의 타월>로 씻어서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말이 아니다. 정신 장치로의 번역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가 보여주는 단서를 통해서 정신 장치의 움직임을 추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초자아 형성의 모델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수건이란 초자아가 지나간 흔적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어쩌면 이것을 ‘자아 이상’이나 '이상 자아'라고 검토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목표나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실낙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도 있는 것일까?
혜연 씨가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이유는 가족을 싫어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폐쇄병동에 입원시킨 부모님이 원망스러울 수는 있다. 특히 엄마를 향해 ‘독한 여자’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독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여겨졌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여성 내담자들은 나에게 어머니를 '독한 여자'로 표현하곤 했다. 물론 그만큼 어머니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가감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과 불화가 있는 신경증자가 이런 말을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 정신적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자기 증상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증상을 수용하기 쉬워져도 치료와는 큰 관계가 없다. 나는 실제로 이러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부모님 때문에 증상이 발병했는데, 나을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런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부모님 없으면 증상이 사라졌니?"
혜연 씨는 변함없이 나를 지독하게 쫓아다녔다. 덕분에 늘 보호실 행이었다. 심할 땐 내가 출근하면 보호실에 직행했다. 좀 미안했지만 그 모습은 자신의 증상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 행동의 의미들이 번역되기 전에는 귀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