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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4. 2017

세크리터리

정말 이 두 사람은 피학-가학 관계였을까?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성적 쾌감과 연관시킨다. 그들이 성적 쾌감을 요구하기 때문에 가학 하고 피학 당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단순한 관점은 진정한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에게 불편함을 안겨 주지 않을까?


 가학과 피학에서는 반드시 사랑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 고통이 향락의 신호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을 간과한 채 고통을 바로 쾌감으로 연결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피학 사진들에서 그냥 얻어맞은 채 쾌감을 느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서는 신경증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싸이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말은 정정되어야 한다. 피학증자라도 현실의 고통에서는 고통을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고통이 쾌감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것을 기억한다면 이 영화의 설정은 변할 수 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가학과 피학이라는 자극적인 카피로만 광고를 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훌륭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나 오해에 대해서는 수정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가학-피학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진지하게 영화를 감상하기위해서는 약간 더 복잡하게 따져 보는 수고가 필요하다.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가학증자는 진정으로 피학증자를 원할까? 이미 들뢰즈는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의 저서 매저키즘에서 말하고 있다. 가학증자는 피학증자를 찾지 않는다. 그 역도 물론 성립한다. 쾌감을 주기 위해서 가학 한다면 목표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가학 하는 것이지 쾌감을 느끼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피학증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때리면서 쾌감을 느끼길 바라지 않는다. 실제 가학 – 피학증자들이 플레이를 한다고 해도 죽일 만큼 강하게 때릴까? 상대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경우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상처 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영화의 여주인공 리 할로웨이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자해에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요양원에 있다가 나온다. 그녀가 요양원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자해는 몰래몰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녀가 자해를 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쾌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녀의 표정은 분명 쾌감을 느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피학과 자기 처벌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자해라는 방식으로 자기 처벌을 하고 자기 내면의 죄책감을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죄책감의 처벌을 통해서 맛보는 해방감을 즐기는 것 아닐까?      

주인공, 리 할로웨이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고통을 쾌감과 바로 연결 짓는 사람들의 태도다. 그래서 자기 처벌의 문제는 피학증 문제로 오해되어서 널리 퍼진다. 물론 오해할만한 단어들도 존재한다. 주이상스의 문제 역시 이러한 오해를 가질 수 있다. 고통이 극에 달하게 되면 쾌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이상스가 때론 <지복>으로 재번역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학문을 하는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이 결국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인과를 따지지 않고 너무 간단명료한 설명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편이 쉽고 이해하기 좋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결정 과정들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처벌이 쾌감을 가져다주는 색다른 경우도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자기 처벌이 극에 달하게 되면 비열한 생각에 끌릴 수 있다. 강박증자는 그러한 비열함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동으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분명 드물 것이다. 신경증은 <음성 변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비열함을 실제로 옮길 수 있다면 정신병의 문제를 의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필자가 발표한 사례는 자해의 문제였다. 그것은 강박증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방향이 어떤 의미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우회하게 된다. 자해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공격하고 싶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벌할 생각조차 내적 죄책감과 연결된다. 따라서 스스로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에서는 죽이고 싶은 사람들 천지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해석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자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적 연구결과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따로 설명되지 않고 뇌가 잘못되었거나 인지부조화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영구적인 자해증자로 남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신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병리적인 방식이 선택된 것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가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 그녀가 무엇을 느꼈는지에 집중한다면 의외의 결과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리는 자해의 순간에 쾌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분명히 어떤 쾌감이 전제가 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처벌했다. 자기 혼자서 그것을 느꼈다는 말은 자기의 내적 죄책감이 있는데 그것을 처벌할 수 있었다는 해방감일 것이다. 해방감은 곧잘 쾌감과 오해를 빚을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라는 이름의 사진이 1945년 8월 미국의 라이프지에 실렸다. 그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두 사람이 아무 사이가 아닌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해방감의 상태에 도취되어있기에 어떤 행동이라할 수 있는 것이었다.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는 곳에서 동시에 임신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명한 종전 키스 사진


 요양원을 나온 그녀는 타이피스트가 된다. 특이하게도 타이핑을 할 때는 집중해서 타자기를 두드린다. 혀를 한쪽으로 빼 어물고 타이핑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그녀는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타이핑했지만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타이핑은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타자기를 치는 일은 현재의 기계식 키보드를 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타이핑에 온 힘을 쏟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을 짚어보자. 히스테리와 강박의 관계가 말과 글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가 난독증을 이야기할 때, 말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지만 유달리 글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주변의 기호를 해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리의 강박증이 그렇게 까지 진행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특징적인것을 생각해보자.  타이핑은 읽기가 아니라 쓰기의 영역에서 기능한다. 온라인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난독증 진단을 받은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채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흥미롭게도 난독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어떤 학생은 나와 디지털 정신분석을 한동안 진행했었다. 말이 아닌 글로 진행하는 정신분석인데도 말이다. 만약 타이핑이 의사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말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이라면, 난독증 진단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녀의 빼어난 타이핑 실력은 우연이 아니다. 타자기를 치는 그 과정만큼은 그녀가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타이핑이란 힘든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과 즉각적인 연결을 이끌어 낸다. 취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취업이 되는 과정이 좀 별나다. 면접을 보고 타이피스트로서 받은 상장을 확인한다. 그리고 호구조사와 애인 유무를 조사한 뒤에 합격하고 취업이 된다. 그녀는 그날로 미스터 그레이의 비서가 된다. 물론 이런 사실은 충분히 기쁜 일이다. 요양원에서 사회복귀가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하던 가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 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실로 한걸음 내디뎠다. 현실과 그녀를 연결해줄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용주인 변호사 그레이가 좀 기묘하다. 그레이는 리를 묘하게 쳐다본다. 그녀를 꼼꼼하게 관찰하려고 한다. 그녀를 힐끔거리기도 한다. 누군가를 이렇게 훔쳐본다는 것은 묘한 불편감을 떠올리게 한다. 스토커들이런 식으로 관찰대상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몰래 훔쳐본다. 그것이 그들의 쾌감이기 때문이다. 그레이 역시도 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를 훔쳐본다. 이 것이 그의 쾌감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는 훔쳐보고 운동을 해야만 했다. 타오르는 열정을 따로 풀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색이야)

 꾸준히 리를 관찰해온 그레이는 그녀가 자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녀를 자극한다. 그리고 그녀를 불러서 다시는 자해하지 말라고 지적까지 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리가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서 동시에 처벌해줄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자해가 자기 처벌인데도 불구하고 해방감을 느꼈다면 자신을 처벌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그런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피학 관계에서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레이는 리의 조그만 실수에도 야단치고 다시 일을 시킨다. 여기서 좀 독특한 것은 그레이가 리의 엉덩이를 때리는 장면이다. 그것도 아주 찰. 지. 게. 그런데 여기서는 리가 더 이상하다. 그녀는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좋아한다. 그것이 그녀의 해방감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일까? 이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프로이트로 되돌아 갈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매 맞는 아이 논문에서 히스테리나 강박 신경증으로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아이가 매를 맞는> 환상에 빠진 것을 놀라울 정도로 자주 고백해오는 것을 지적했다. 문제는 이 환상의 문제가 처음에는 저절로 생겨나지만 나중에는 정신에서 강제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환상이 일깨워지는 것은 첫 성경험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고 더 죄책감이 들 것이다. 물론 이 것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5세나 6세 정도에 어떤 방식의 고착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것이 시사해주는 바는 그녀의 쾌감이 피학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강박신경증의 한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분 요소가 전체를 판단하게 만들어서는 안 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리는 분명 자기 처벌을 통해서 해방감을 느끼던 강박증자였다. 그런데 그레이가 엉덩이를 때려준 것이 어떻게 그녀에게 불쾌가 아닌 쾌감을 일으킨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해는 그녀에게 해방감을 안겨주었지만 엉덩이를 때린 사건은 그 이상의 황홀경을 경험하게 한 것일까?     


 이 내용은 마찬가지로 그레이에게도 적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학 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 것은 아니라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그는 가학 이후의 휴식시간에 오는 쾌감을 즐겼다. 따라서 처벌 과정에서의 쾌감은 오로지 리에게만 해당이 되며 그레이에게는 단지 성가신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성가심의 문제를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아했다. 그래서 일이 많아지게 되자 그는 리에게 처벌하는 것을 중지한다. 이때부터 리의 욕구불만은 점점 극을 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리가 그레이를 도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의 도발에 그레이는 꿈쩍하지 않는다. 무관심하고 무신경해진다. 그는 자기 일만 신경 쓴다. 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대체 왜? 그런 쾌감을 맛보게 해놓고 다시 나에게 주지 않는지 욕구불만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만약 그 행위가 전제하는 것이 쾌감이었다면 그레이는 유혹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 강제의 형태로 다시 안 할 수가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접근이 과도한 그레이(색이야)

  꼭 한번 리는 그레이를 성가시게 만든다. 길에서 잡은 지렁이를 눌러서 그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흥분한다. 그리고 리를 부른다. 엎드리게 하고 스커트를 올리라고 한다. 리는 준비되었다는 듯 익숙하게 자세를 취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팬티까지 내린다. 그녀는 분명히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가 성가심을 견디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측면은 여기서 힘을 발휘한다. 그레이는 바로 앞에 여성을 두고 자위행위를 함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이 행위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그녀의 성적 가치를 완전히 낮춰버리는 일일 것이다. 동거 중이거나 결혼한 커플에게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될 수 있다. 컴퓨터로 야한 동영상을 다운받아서 자위행위를 하는 남편 혹은 남자 친구를 본 여자 친구는 그 모습에서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언제나 함께 살을 섞으며 살았지만 남성이 자기 환상을 즐기는 모습에 혐오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유는 이럴 것이다. 그 환상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한 부부라고 할지라도 이런 장면을 보게 되면 혐오감이 생길 수 있다. 남편이 야동을 보고 자위를 하는 것을 목격한 부인이 그 장면을 끔찍하게 여긴다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그레이는 왜 그녀를 만족시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왜 그렇게 자위해야만 했을까? 물론 우리는 이 시점에서 프로이트의 애제자였던 오토 랑크의 연구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여담이지만 오토 랑크가 탄생 불안이라는 엉뚱한 연구결과만 내놓지 않았다면 현재 정신분석 연구는 훨씬 더 진보했을 것이다.      


 그는 콘돔을 싫어하는 신경증자들의 특성에 대해서 연구했다. 신경증자들이 콘돔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받아들이기 곤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콘돔이 지금처럼 발달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신경증에서의 상징 문제를 거쳐 콘돔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섹스 행위는 단순히 쾌락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생식 행위가 더불어서 따라오게 되는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따라서 성관계의 결과로 생명이 탄생해야 한다. 피임은 이 생명의 문제를 지나치게 만든다. 무의식 상징은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작용한다.


 리는 제임스로 인해서 더 이상 자해하지 않았다. 자해의 해방감과 성적 판타지가 주는 오르가슴의 정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해의 해방감이 오르가슴에게 압도적으로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즉, 그녀를 그녀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은 오르가슴이지 해방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아버지의 자리를 거부하는 강박증자의 모습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의 신경증적 전략은 리를 욕구불만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해고당하게 된다.      


 그녀는 다시 쾌감을 찾기 위해서 다른 대상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녀와 교감할 수 없었고 혐오감만 심어주었다. 이 때는 대상 선택의 문제가 들어간다. 여성의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한 대상이 여성에게는 각각의 개별자로 인식되는 반면 남성에게서는 <창녀> 그리고 <이상적인 숙녀>이라는 항으로 불완전하게 나뉜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미학적 가치 기준이 포함된다. 남성은 언제나 완벽한 파트너와 비슷한 대체물을 세울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시사해준다. 여성도 그것이 가능할까?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여성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은 <나 죽어요>라는 말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사라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즉, 여성의 입장에서는 그 남자의 가치를 저하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 남자의 대체물을 세울 수는 없다. 이것은 융과 사비나 슈필라인 간의 불륜관계에서 이미 증명되듯이 나타난 것 아니었는가? 융은 사비나와 똑같은 대체물을 세우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그러지 못했다. 겉으로 성공적인 삶이었지만 내면에서는 실패만 반복해야 했다.      


 영화로 돌아가 보자. 리는 사귀던 피터와 섹스를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가 그녀의 쾌감을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표정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녀는 잠시라도 그레이를 잊기 위해서 대상을 탐색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피터가 연속적으로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했다면 그는 발기부전에 빠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남근이 그레이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리는 그레이와 같은 대상을 찾아서 방황했다. 그레이를 잊기 위해서는 다른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그것을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지막 수단으로 피터와 결혼도 하려고 한다. 그녀가 자기 처벌을 통해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면 피터와의 결혼은 최종적인 수단의 자기 처벌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식도 실패한다.


 그녀는 식장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그레이의 사무실로 달려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처벌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그녀가 피터와의 결혼을 포기한 명확한 이유가 나타난다. 그녀는 병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결혼식장을 뛰쳐나온 리

 그레이의 사무실로 쳐들어간 리는 그곳에서 단식투쟁을 감행한다. 그 누가 와서 그녀를 말려도 듣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레이가 주는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광기가 드러난 것이었다. 또는 그것이 건강해 지기 위한 절박한 소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종의 망상에 빠져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레이는 그런 그녀의 광기를 피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잘 피해 다니면서 살았는데 법적인 책임을 지닌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그는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그녀의 광기에 패배한다.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자신과 리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법을 피해 가는 변태증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변태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회피할 것이다. 강박증자들이 시선을 회피하는 이유 역시 비슷하지 않은가?


 그들은 결혼 이후에도 서로 도발하고 피가학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것이 과연 병적일까? 그것은 아니다. 다만 그레이에게는 불만일 수가 있다. 그는 아버지의 지위를 지니지 않기 위해 그동안 즐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즐거움 뒤에 찾아올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리는 건강을 회복했고 그레이는 다른 여자에게 흔들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떤 결과든 두 사람이 건강을 회복한 것은 사실이 되지 않았는가?


결국 맺어지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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