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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4. 2017

나쁜 남자

욕망의 이기성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 이 영화가 상영되던 당시 여성비하 문제가 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평범한 여대생을 창녀로 전락시키는 영화의 내용은 여성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이 것이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이 될 수 있다. 사실, 영화가 현실을 따라가질 못하는 요즘이다. 상식에 종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결국 일반적인 편견의 잣대만을 들이밀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 행동도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꽤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관객에게 충격을 줌으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 점에 있어서 영화 예술로서의 나쁜 남자는 성공적인 내용 아닐까? 우리는 해외의 예술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비난받는 예술 작품을 만든 작가는 사회적 이슈를 일으킨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삶에서 충동의 선택지를 미리 예측하여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보자. 코스타리카의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2007년 병든 유기견을 데려다가 전시회장 한 구석에 묶어놓고 죽을 때까지 물과 먹이를 주지 않는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게다가 개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료로 메시지를 적어놓기까지 했다. 그 개는 다음날 죽었고 베르가스는 이를 <굶어 죽은 개>로 이름 붙였다. 2008년 중앙아메리카 비엔날레에서 전시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에게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는데 기예르모의 블로그에 사이버테러가 가해지고 자택에도 작품에 반대하는 무리가 찾아왔다. 여기서 그의 작품의 다음 단계가 진행되었다. 그는 보건소에서 도살당할 개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만약 돕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유롭게 데려가도 좋다고 한 것이다. 예고한 대로 미술관에는 <굶어 죽는 개>가 전시되고 많은 인파가 몰렸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개를 돕고 싶은 사람은 데려가라는 메시지를 쓴 팻말을 세워두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개를 데려갔다. 이러한 베르가스의 기행은 곧 잊혔지만 몇 개월 후 도심의 공원에는 병들고 쇠약해진 개들이 나타났고 개들 앞에는 “돕고 싶은 사람은 데려가세요”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작품은 그 시점에 완성되었다. 사람들이 직접 베르가스의 방법으로 개를 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의 위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가치를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것이 우리의 숨겨진 허울을 벗겨내는 충격이라면 훨씬 깊은 철학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덮쳐서는...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의 결말에서 의외의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아무런 이해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전문가의 평론을 통해 어떤 방식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선화가 한기와 떠돌이 창녀 생활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은 육체적인 사랑을 지양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한다는 낭만적인 해석에 대해서 사람들이 수긍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보다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랑에는 상호성이 전제가 된다. 그들 사이에 주고받는 것이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서 한기와 선화가 주고받는 것이 있을까? 한기는 선화에게 남근도, 돈도 주지 않는다. 선화는 다른 사람의 남근을 만족시킴으로 돈을 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욕망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사랑의 문제를 언급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남녀 관계에서 특징적인 것이 관찰할 수 있는데, 남자가 물질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말이라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기는 선화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똘마니들도 선화와 잠자리를 가지지만 그는 하지 않는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의 욕망은 그 시선에 담겨 있기 때문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남성 욕망의 이기성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욕망하는 대상의 파괴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을 우선 이야기하자. 한기가 그녀를 창녀로 만드는 이유는 이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가질 수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녀가 모든 사람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방식을 채택한다. 이 것은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 아닌가? 김기덕 감독의 전작이 불교적인 색채를 띤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불교 이야기에서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어느 마을의 절세미녀가 있는데, 한 사람이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사람의 여자가 된다. 창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엄청난 돈을 번다. 그것이 그녀가 부처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모티브에 불과하다. 이 것을 차용해서 남성이 어떻게 욕망 대상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분석 시간에 비슷한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를 떠난 연인이 완전히 망가져서 나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소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기가 선화를 보호해주는 것 같은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화가 일하는 모든 장면을 한기가 관찰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 남성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여성이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장면을 가만히 견딜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의 상식의 문제가 흔들리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옷을 벗은 채로 다른 사람의 다리를 감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는 상상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버틸 수 있을까? 만약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일상적인 부품에 불과할 때, 가능할 것이다. 쓰고 버릴 수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기는 그녀가 사귀던 사람과 첫 경험을 가지는 것을 허용해 주는 척하면서 방해한다. 이 것은 <샬로 소돔 150일>에서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커플의 첫날밤을 억지로 분리시키는 것을 떠올리게 만들어준다. 상대를 향한 성충동의 발현 자체를 차단시켜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문과도 같은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첫 경험의 문제가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 경험의 흔적이 평생을 뒤따라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욕망의 일방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욕망에는 상호성이 전제되지 않는다. 일방적이기 때문에 개연성도 따지지 못한다. 한기가 선화를 처음 만났을 때, 강제적으로 키스한 것에는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다.  한기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녀의 어떤 세부사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또 다른 무엇인가가 한기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그의 욕망이 이끌리는 어떤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 영화는 선화의 무릎을 보는 한기의 시선을 스크린을 통해 잡아낸다. 한기가 헤세의 <지와 사랑>에 등장하는 골드문트처럼 여자의 무릎만 보고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한기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무의식에서 설치는 한기의 어머니가 지닌 이미지와 연결이 될지도 모른다. 무의식 이미지와 연결된다면 상식적인 이해를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을 가설을 세워보자. 두 사람 사이에 상호성이 생기는 순간부터 그의 욕망은 실패로 치닫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그녀를 파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일방성이 사랑의 상호성으로 전환될 때, 한기는 일종의 구원 충동을 경험하고 아버지라는 책임을 맡아야만 했을 것이다.      

대학생에서 창녀로 전락한 선화

 영화에서 한기의 구원 충동이 등장하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사형수로 수감이 되었을 때, 한기는 선화를 풀어주라는 지시를 한다. 파괴하는 것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것을 선택함으로 자기 욕망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그것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단이 실패로 돌아간다. 이 지점에서는 선화가 더 이해되지 않는다. 한기의 사형집행일이 다가오는 것에 그녀가 더 불안해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녀는 왜 불안해하는 것일까?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화가 정말 한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울부짖어야 했던 것일까?


 포주인 은혜는 선화에게 말한다. 대학생에서 창녀로 전락시킨 그놈이 그렇게 된 것이 오히려 좋지 않냐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느끼기에도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화의 인생을 망쳐버린 한기의 태도는 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화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의 욕망이 한기에 의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변형된 것은 아닐까? 한기의 시선이 그녀의 욕망의 문제와 어떤 관련성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정교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녀의 불안이 잠재되어 있던 노출 충동의 만족과 관계된다는 가설을 세워보자. 그녀에게 잉여된 시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즉, 그녀를 욕망하지만 가질 수 없는 남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노출 충동과 쌍을 이루는 수동 충동은 현실의 변화를 담보하지 않는다. 그 상태에 머물게 만드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터는 선화의 욕망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선화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직접 말해야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섹스 기술의 장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변태적 관계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기와 선화는 섹스를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변태증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데, 서로가 성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선화가 다른 남성들에게 만족을 제공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어떤 관련성을 가질까? 이때, 그녀의 행위는 노동으로 환산된다. 단지 돈을 위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한기가 선화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녀의 노동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즉, 선화는 파괴될 욕망의 대상이지 품어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화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디프스 콤플렉스의 문제를 포함해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아버지에 대한 내용들이 등장할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별 문제가 없었음에도 아버지에 대한 공격성의 문제를 내포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녀가 이 방식을 통해서 스스로를 고립된 상태로 내 몰고 있다는 것은 선화가 어떤 심리구조로부터 출발하게 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그녀를 찾는 가족이 없다는 점이다. 선화의 남자 친구가 납치된 선화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파괴하기 위해 가질 수 없다.

 그녀의 삶이 한기의 욕망에 의해 왜곡되어 실현된 것이라면, 마치 꿈과 같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선화는 현재 삶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녀의 삶을 은근히 장악하고 있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것을 영화적 스토리로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도 이런 관계는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변태적인 관계들에서 금전적인 것이 개입하게 되는 경우 이런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폭력이 아닌 보다 우아한 방식의 회유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계의 지시로 잠시 유흥업에 몸을 담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동시에 주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유혹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정체성과 경제적 가치에 대한 미혹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 처해지는 것이다.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자기 의사로 성 노동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노동이라고 하지만 생산성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혼란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오랜 시간 동안 유흥업에 종사하면서 지역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이 어느 날 느낀 공허감으로 자살을 시도해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는 경우이다. 그녀가 쌓아온 것은 유흥업에 대한 경력이었고 그 외에는 다른 생계수단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단지 유흥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온 것이다. 그녀는 자기 일의 결과로 어느 정도의 인기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길 수 있는 결과물이 없기에 혼란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많은 돈을 벌지만 그 돈이 다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가 지적했는데, 벌어들일 만큼 자신을 치장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성의 문제에서 곤란을 경험할 것이다.


 한기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 대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화를 아무도 가질 수 없게 파괴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다. 이 것은 어린 여성을 유흥업에 종사하도록 유혹하는 남성에게서 곧잘 관찰될 수 있지 않을까? 상대의 거절은 거절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실은 언제나 변화를 가져오기에 마음이 변할 수 있는 상태로 진행할 수 있다. 여성의 주체성이 파괴될 때, 종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것은 궁극적으로 변태증자들의 행동 아닌가? 정신적 전두엽 절제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내용이다. 만약 그 삶에 만족한다면 그것을 방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가치가 결국 부품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아껴주던 부품이라도 닳아버리면 바꿀 것이다. 아무런 책임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한다. 지금까지 생각한 내용으로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사랑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남성 욕망의 이기성을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불쾌할 것이다. 그리고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것보다 완화된 방식으로 비슷한 회유 과정이 일어날 것이다. 겉보기에 온화할지 몰라도 더 잔인하게 여성을 파괴하고자 할 것이다. 영화가 끝난 현실에서 생각해 볼 내용이 있다.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해서 불쾌감을 가질 사람들은 여성들보다 남성들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남성의 욕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쪽은 여성이 아니다. 같은 남자가 받아들이기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청법 문제로 인한 토론회에서 故 성재기 씨가 했던 강력한 발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야동을 보는 것이 오히려 건전하지 야동을 보지 않고 실제로 행동하고 다니는 남성은 처맞는다는 것이다. 이유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런 행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남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내로남불의 공식을 적용할 수 있는 변태들도 존재하긴 한다. 실제로 여성을 파괴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에 격분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지적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변태성은 드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때, 지나친 억제가 들어가면서 신경증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태성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사이코다. 즉, 정신병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지적을 이 영화에 적용한다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바라만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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