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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5. 2017

Teeth

정말 여성주의 영화인가?

 얼마 전에 인터넷 언론을 통해서 특이한 기사를 접했다. 어느 대학에서 혼전순결운동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의미하는 혼전순결은 법적으로 결정된 배우자 이외의 다른 남성과는 성적 결합을 거부하겠다는 운동이다.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순결'한 양처럼 살겠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나는 동시에 이 영화가 생각이 났다. 생식기에 이빨이 있다는 기괴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내용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히스테리'가 생각이 났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히스테리가 대 유행을 했었다. 여성들이 많이 시달렸었고, 남성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는 남성들에게서도 히스테리가 발견된다. 여기서는 성적 억압이라는 것에 시달리는 내용이 있었다. 성적인 것을 너무 억압하기에 히스테리가 발병하는 것이었다. 문명화 과정이 이런 내용의 역전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닐까?


 이 영화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이었다. 그녀들은 페미니즘도 이야기하고 남자 친구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는 반응을 영화에 달린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반응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성'의 문제를 성 행동에 한정 짓는 태도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남자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여성이 노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으로 생각하고 보기에는 영화 속의 주인공은 상당한 괴로움에 시달렸다. 만약 페미니즘 영화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이빨 달린 '질'의 문제를 생각하며 동료로서의 남성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데 동료의 추구가 아니라 그녀는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동료로서의 <남성>이란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좀 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많은 남성들에게서 종종 등장하는 문제 중 하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버틀러와 같이 젠더 문제를 논하는 학자들의 멋들어진 문장들을 인용하지만 결국 여성은 <성 대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들이 언제나 성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을 가능성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일까? 남성성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음란물 수집의 열정에 못지않을 것이다. 심각하게는 축제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의 대사 <너, 내 동료가 돼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페미니즘적일 수 있다. 나미와 로빈과 같은 늘씬하고 멋진 데다가 노출도가 높은 여성 동료가 주변에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짚모자 해적단에서 성적 의미가 담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동료이기 때문이다.      

의사선생! 손가락이 위험해!

 '이빨 달린 질'이라는 민담은 낯선 여인과의 섹스에 대한 경고로 사용되는 내용이었다. 즉, 아무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게 된다면 남근이 거세될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이었다. 남성의 거세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내용이다. 물론 정신분석에서도 이빨 달린 질(Vagina dentata)이라는 개념이 있다. 샨도 페렌치는 여성의 질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입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먹는다>라는 관념에서 흥미로운 것을 추출할 수 있는데, 그 행위가 공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먹음이 공격이 될 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환상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했듯이 만약 우리의 의식에서 이빨 달린 질에 대한 두려움이 머물고 있다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구강성교에 대한 공포감이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이빨 달린 질과 상반되게 이빨 달린 남근의 이미지도 있다. 여성의 생식기를 파괴하는 남근이라는 이미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오히려 성적 능력의 증가를 위한 방법으로 남근에 무엇인가를 심는 수술을 실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기괴한 감각에 직면할 수 있다. 과거의 '파괴'의 이미지는 현재의 '즐거움'으로 그 모습이 변해있는 것 아닐까? 억눌렀던 것들의 모습이 기묘하게 변해있는 것이다. 마치 억압된 관념이 귀환해서 일으키는 신경증의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변태적인 모습들이 <음성화>되는 것이 신경증 아닌가? 입술이 이빨을 가려주듯,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순결클럽 강의

 영화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혼전 순결을 지지하는 순결 클럽의 리더인 던은 집단의 요구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심각하게도, 그녀의 입장에서 순결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순결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빨>은 침입하는 모든 물질들에 대해서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에서 리더를 맡고 있다는 것은 그녀는 순결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의 문장과 연결될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린 사람에게 에로티즘이란 없다.     

 던은 순결 클럽의 리더로서 집단의 충동을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프로이트가 연구하기로 집단의 충동은 거대하기 때문에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예'할 때 혼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집단과 분리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던은 순결 클럽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클럽활동은 고통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가면을 벗은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정치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그는 어린 시절 호기심에 던의 생식기를 만져보다가 물린 적이 있다. 그때의 충격에 의해서인지 항문 섹스만을 고집한다. 여자 친구와 둘이서 제한 없는 성관계를 즐기고자 하지만 생식을 원하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진짜 남성으로서 여성을 대면하길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에 대한 환상을 실현시키고 싶어 하지만 직접적인 대면에 대한 실질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혹은 근친상간의 환상에 시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엉덩이가 중요해....임신은 위험해...

 던에게는 좋아하는 남자도 있었다. 데이트 과정에서 단 둘이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남자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런 그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던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던의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강행하던 그는 이빨에 물리고 만다. 물론 남자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상황은 던에게 있어서 더 문제다. 좋아하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빨 달린 질의 문제는 현대에 기묘한 방식으로 변화되어 있다. 우리는 성적 갈망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범람하는 음란물과 자위기구들은 우리에게 혼자서도 성적 만족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생식 행위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이때, 현대에는 성욕이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다. 조그마한 자극도 견딜 수 없어 끝까지 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는 상대방의 생식기의 파괴를 진두지휘 할 수 있다. 과도한 성관계는 바로 이것을 상징하게 될 수 있는데 남성이든 여성이든 과도한 성적 행위로 인해서 불러일으켜지는 신경쇠약은 면역력의 저하도 함께 불러온다. 따로 질병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심각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성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녀는 나에게 자궁경부암에 걸렸다고 호소했다. 당시 그녀의 주치의는 발병의 원인을 과도한 성관계라고 지적했다. 당시 그녀는 연애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현재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 사진을 본 것이다. 사진 속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알 수 없는 질투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남자 친구가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렸었다. 혹시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잠자리에서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짓게 될지에 대한 상상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얼마 후 그녀는 암수술을 받았다. 결과는 좋았다. 동시에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댕강!

 생식기가 만족을 담보하지 못하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변태적인 방식들은 모두 이빨로 기능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섹스는 그들 주변에서 항상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 너머에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영역이 되었기에 그들은 시체와 같은 방식을 반복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고민했다. 라캉은 여성 분석가들에게 오르가슴의 경험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남성은 여성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의 증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이 그토록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설을 뿌렸음에도 그는 여성을 알 수 없었다. 만약 여성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는 그녀를 하나의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여성들에게 만족을 주고 인기를 끌고 자기 뜻대로 다루고자 하지 않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 영화의 메시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성주의나 거세를 프레임으로 잡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자른다>는 사실 너머에 숨겨져 있는 어떤 의미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관객인 우리가 찾아야 하는 문제다.


 던은 이빨로 인해서 성관계를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딱 한번, 성관계의 성공을 경험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 지점을 잘 지켜보아야 한다. 유일하게 던을 이해해주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던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잃은 던은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때, 그녀를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니던 어떤 놈의 집에 찾아가게 되고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가지게 된다. 던에게 있어서 이례적인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리비도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이 된다. 그리고 기분도 좋아진다. 그녀는 그와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금제 해온 순결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오빠와 그 녀석의 은밀한 공모관계를 엿듣게 되고 분노하게 된다. 던은 굳은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 녀석을 다시 성관계 분위기로 유도한다. 이 것은 무척 의미 있는 내용인데 유혹에 성공함과 동시에 자른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어째서 그 녀석이 물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성관계를 치르는 것이 가능했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학자들의 문장을 빌려와야 할 것 같다. 생전에 서로의 저작을 보지 않은 두 사람 라캉과 바타이유의 문장을 조합해 본다면 이 장면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문장을 변주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새로운 영감을 떠올리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라캉은 데카르트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비틀어서 자신의 문장을 만든다. “나는 생각할 때, 존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타이유의 문장 두 개를 결합해 보자. 우리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할 때 에로티즘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을 때 에로티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진정한 오르가슴을 느끼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잡지 등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여성들의 오르가슴 경험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을 읽을 수 있다. 혹은 머릿속에 종이 울리거나 파도가 밀려오는 느낌으로 설명되지 않는가? 따라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이 점은 남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어떤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나 좀 아무 생각할 수 없게 해줘!>. 황홀경의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카마수트라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단서를 하나 찾을 수 있다. 카마수트라는 섹스를 활용한 요가이다. 섹스를 활용해서 일체감을 느끼게 되면 두 사람이 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성관계가 요가와 결합하면서 정신의 수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관계에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대의 행위가 정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우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던은 오빠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잠옷 차림으로 오빠와의 성관계를 원한다는 듯이 찾아간다. 물론 그렇게 유혹한다는 것이 역겹다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액션 영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빠가 더 이상하다. 왜 던의 유혹에 반응하는 것일까?


 그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가 속죄하고 있는 것일까? 좀 더 정확하게 그가 원하는 것이 바람둥이로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게 되는 것일까? 그가 스스로 던에게 자신의 남근을 준다는 것의 의미는 충분히 피학적이다. 자신의 기표를 떼어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자기 처벌을 실시하는 것일까? 혹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은 그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항문 섹스만을 해왔다. 생식기로 향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가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게 된 결과였을 수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지 않기 위해 거세의 선택한 것일까?      


 따라서 그는 잘린 이후에도 다른 남자들보다 안정적이다. 그는 결과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의 거세된 남근은 키우던 애완견이 먹어버린다. 그의 남근은 이제 쓸모 없어졌으니 “개나 줘버려”가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빨은 정말 거세를 위한 것일까? 겉으로 보이기에 끔찍해 보이는 이 거세란 궁극적으로 여성의 만족감과 어떤 의미로 연결 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던이 히치하이킹을 한다. 그 차에는 징그러운 영감이 있었다. 던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위협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미소를 짓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에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던은 이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비장한 미소를 짓는 것일까?     


댕....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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