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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5. 2017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내용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은 난해하다. 그만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심지어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뛰어난 문학작품은 영상으로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 작품 역시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물론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는 비판이 쏟아질 수 있다. 원작이 남겨주는 강렬함을 영화가 모두 소화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작은 영혜의 입장을 3명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장면들을 고민해야 하고 어떻게 영상으로 녹여야 할지 괴로워야 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영혜의 상태변화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가던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접하게 된다면 단순히 <편식>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채식은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서 채식만을 고집하게 된 것일까? 채식은 이후로 정신병으로 이어진다. 이런 내용과 흡사한 내용이 있을까? 우리는 그런 내용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루는 실화가 있을까? 국내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외의 사례에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번역이 되어 있을까? 답은 <YES>이다.      


 이 것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조금 알아야 한다. 지금의 조현병이다. 물론 정신의학에서도 영혜를 조현병으로 진단할 수 있다. 정신의학의 진단체계가 현상 진단이기 때문에 동일한 현상이 관찰된다면 진단명은 쉽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영혜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의 것을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영혜의 상황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문학적 텍스트로만 그치겠다면 이런 노력은 불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의 중요한 임상 기록 중 A.셰셰이에 박사의 <르네의 일기>라는 작품이 있다. 다양한 정신분석 서적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르네>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와 <르네의 일기>를 함께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꽤 중요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흥미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영혜가 채식을 시작한 시점에서 정신분석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과정은 아마도 르네의 치료과정과 비슷하게 진행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르네가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채식주의자처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책은 서로의 음화와 양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과 실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신경증과 정신병의 발병과정에 대해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신경증은 어떤 사건을 통해서 발생할 수 있다. 신경증의 트리거 개념은 본격적인 발병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발병하게 되었을 때, 현실에서 총알처럼 멀어진다. 신경증이 촉발되는 사건에 괜히 트리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신경증이 그렇다고 정신병의 발병과정이 같은 것은 아니다. 신경증도 그렇지만 정신병의 발병과정을 탐색하는 것은 더 곤란하다. 일상생활 속에 은근히 스며들어서 서서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국가사업을 시행하기 위해서 주소가 바뀌는 경우, 그것을 확인한 순간에 본격적인 발병이 시작될 수 있다. 혹은 데이트조차도 발병 조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신경증은 현실에 참여하기 위해 버둥거리면서 발생한다면 정신병은 그대로 스며든다. 그래서 정신병이 있더라도 생활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분열증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블로이어는 정신병의 범주에 있는 편집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편집증자는 자신이 편집증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 것이다

 우리는 리비도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서 리비도를 <관심>으로 번역해도 괜찮을 것이다. 편집증의 리비도는 그 방향성이 외부를 향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일상생활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래서 편집증자는 자신의 편집증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분열에서는 리비도가 내향화된다. 융이 분별없이 쓴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단어의 문제가 여기에 있는데, 내향성은 원래 정신병에 한정해서 적용이 되던 말이었다. 지금은 소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말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작품을 생각해보자. 영혜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채식을 시작했다. 책에서 설명하는 그녀의 꿈은 상당히 모호하다. 처음에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숨겨주었다. 여기서 잠이 깬다. 그리고 또 꿈을 꾼다. 우리는 이 부분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깨어나서 죽인 사람이 자신인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자신이라면 살해된 사람이 누군지, 혹시 가장 가까운 누군가일까? 그 사람이 자신을 죽였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것을 감춰준 사람에 대한 의문도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의 정체가 삽이었다. 커다란 흙삽으로 머릴 쳐서 죽인 것이다.      


 그녀가 무수히 꾸어왔던 꿈은 중요하다. 그녀가 술에 취하는, 즉, 평소보다 억제가 풀리는 것처럼 꿈이 그녀의 지난 꿈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꿈을 꾸면서 다른 꿈을 다시 꾸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구조를 가진 꿈은 현실을 꾸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이런 꿈의 구조적인 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녀의 꿈에서는 현실이 가공되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영혜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신을 물어뜯은 개를 때려죽였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린 영혜에게 괴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중요한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초자아의 형성과정이 병리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개를 때려죽일 때 쓴 도구는 삽이었다. 그 삽 자체의 용도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녀의 채식이 이 삽의 관념과 연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꿈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물어뜯은 개를 처벌하는 꿈이었다. 여기서 채식의 문제가 등장할 수 있다. 삽으로는 땅을 파서 그곳에 채소를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억 연상은 이렇게 이어질 수 있다. 아버지는 채소가 올라와야 하는 곳에 개를 묻었다. 이 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 될 것인가?      


 결국 꿈은 그녀의 병리적 초자아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 작용은 사랑하는 개를 잃었던 문제를 꿈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개는 땅에 묻혀서 채소를 기르는데 거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거름으로 한 채소를 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어린 영혜는 개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에게 심한 장난을 쳤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개에 물리는 경우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개는 결국 아버지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사랑하는 어떤 것을 먹었다는 관념은 섹스의 관념으로 연결될 수 있다. 동시에 혐오도 함께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너 왜그래?

 영혜는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한다. 꿈을 꾸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꿈을 꾼 이후로 그녀가 느끼는 고기 냄새는 혐오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어떤 것을 자기도 모르게 섭취했다는 내적 죄책감의 문제가 그녀를 엄습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혜의 채식은 여기서 속죄와 연결된다. 사랑하는 것의 고기는 그녀에게 혐오감과 역겨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고기란, 생명체의 피부로 대표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남편과 살을 섞는 것 역시 고깃덩어리를 마주하는 것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곧이어 그녀는 집에 있는 모든 육류를 버리기까지 한다. 고기가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영혜에게 고기가 왜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을까? 혐오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혐오감은 우리를 물러서게 한다. 삶이 혐오스럽다면 현실에서 후퇴하게 될 것이다. 고기 혐오는 영혜의 삶을 후퇴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꿈이 그녀에게 스며든 비현실 감정을 드러나게 한 것이다. 


 영혜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트라우마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과연 정신적 외상만이 남았을까? 그 당시에 느껴졌을 비현실 감정이 있지는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르네를 독해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5살 르네는 휴양을 위해 시골로 놀러 갔다. 그곳의 학교에서 독일 노래를 들었는데, 그것이 르네에게 비현실 감정이 출현하게 된 계기였다. 르네는 그때 느낀, 첫 비현실 감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교가 군대 병영처럼 커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학교를 알아보지 못했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노래 부르기를
강요당한 죄수들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학교와 아이들의 노래가 세상의 나머지 것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듯했습니다

 다섯 살 때 이런 것을 느낀 것은 정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때 형성된 구조가 이차성징을 지나 정신병 발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신병 발병의 최소 조건이은 이차성징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논리가 아닌 성인의 형식적 논리를 갖추었을 때, 정신병 발병의 자격을 갖춘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많은 비현실 감정들을 느꼈던 르네는 학교 졸업 직전 폐결핵으로 인해 요양원(15세)에서 1년 3개월을 보냈다. 당시 르네는 흥분 발작 이외에는 정상이었다. 인기도 좋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폐결핵이 완치되자 정신적으로는 더 나쁜 상태가 되었다. 적응도 곤란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녀는 정신분석을 시작하기 전 증상과 투쟁의 시간을 2년이나 더 보내야만 했다. 이 시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녀가 성인의 형식논리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도 이차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고기좀 먹어라

 영혜는 가족모임에서도 채식을 거부한다. 아버지가 강제로 고기를 입에 넣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이때 영혜는 스스로를 자해한다. 가족들은 모두 놀란다. 그녀는 왜 자해를 하게 되었던 것일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는데 강박증과 분열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해의 문제이다. 그녀에게 고기가 다가오게 되었을 때, 그녀의 내적 죄책감은 반응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억지로 먹인 고기는 그녀의 신체에 억지로 리비도를 주입했을 것이다. 영혜는 몸속의 리비도를 지우기 위해서 스스로를 처벌해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강박증이었다면 아버지에 대한 공격성을 자해로 대체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보인 증상에 대한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편집증이었다면 아버지를 공격하거나 어머니를 찌르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위에서 말했듯 편집증자가 지워야 할 리비도는 외부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지워야 할 리비도가 내면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해해야 했다.      


 여기서 자해를 하는 신경증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자해를 할 가능성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신경증은 강박증과 분열증, 멜랑콜리이다. 강박증은 공격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린다. 공격하고 싶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처벌하고 싶은 생각만으로도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해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처벌한다. 멜랑콜리에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자기 자신이 떠안아야 한다. 자해뿐만 아니라 자살이 일어날 수 있다. 과거 정신의학에서 이야기했던 우울증의 자살성향을 엄밀하게 따진다면 멜랑콜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있기에 속죄의 의미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공격성의 색채를 띨 수 있다. 분열증자는 자기 몸 안의 리비도를 지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기 몸속에 들어온 고기라는 리비도를 지우기 위해서는 자해라는 방법 외에 다른 방식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먹은 고기를 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원치 않는 리비도의 침입의 문제다. 현상이 동일하다고 해서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다.


 영혜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남편은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이혼한 것이다. 후에 영혜는 언니의 집에서 한동안 지낸다. 이때, 형부는 처제를 보면서 음란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스케치한다. 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열정을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이 성적인 내용에 민감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아닌가? 작품을 만들고자 할 때 솟아오르는 리비도가 승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처제 모델좀 해줄 수 있을까?

 형부는 영혜에게 모델을 부탁한다. 형부의 음심이 불러온 음모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그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영혜의 몸이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것이고 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말이다. 그가 인정받고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 열정이 부추김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영혜의 나체에 꽃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무척 좋아한다. 처음의 작업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촬영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의 작업이 하나 더 생기는데 이 때는 꽃 그림을 그린 남녀가 성관계하는 듯한 연출을 시도한다. 그러다 실제로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모델을 맡았던 후배 작가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 버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혜가 문제다. 그녀에게 실제로 성적 반응들이 일어난 것이다. 무엇이 그녀를 성적 흥분상태로 몰아넣은 것일까? 성충동을 견디지 못한 형부가 달려들자 영혜는 거부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

 왜 꽃이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우리는 구강기 초기와 말기(이유기)에 고착되었을 때, 발병할 수 있는 정신병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구강기 초기의 고착은 분열이며 이유기의 고착에는 편집증이 일어난다. 이 점은 무척 중요한데 둘의 차이는 <이미지>와 <언어>이다. 그녀가 편집증자 였다면 꽃에 대해서 흥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무미건조한 요구가 성적 호기심을 이끌어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지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영혜와의 섹스에 실패한 형부는 억울하다는 듯이 운다. 운전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억울할 이유도 없을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대체 무엇이 그의 눈물샘을 자극하게 된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의 성충동이 그만큼의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일까? 혹은 다른 어떤 요인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형부는 몸에 꽃을 그린다. 영혜와 함께 섹스를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내용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혜의 섹스가 강간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성관계를 한다는 것의 의미는 꽤 중요한데, 이 것은 영혜의 리비도 문제와 직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꽃의 이미지에 물들어 있는 리비도가 성관계라는 형태로 만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더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암술과 수술이 만나면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 영혜의 세계가 <수정>된다. 이 것은 난자에 정자가 수정된 것과 같은 작용이 정신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때, 그녀는 수정란이 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착상>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해보자.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정신적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고착은 정신분열에서 일어나는 것 아닌가? 이때, 그녀에게 전체 대상은 없다. 남근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 꽃의 이미지를 그려놓은 부분 대상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라캉이 거울 단계를 통해서 설명해왔던 것 아닌가?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결국 땅에 묻혀서 식물의 거름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그 단서가 되지 않을까? 르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자살을 소망했다.     


 두 사람의 섹스는 결국 현장에서 적발되어 두 사람 다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영혜의 몸에 그려졌던 그림은 모두 지워진다. 병원에서 그녀는 나무가 되고자 한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림이 사라지자 망상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망상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이전의 고착 단계로 퇴행할 때, 즉, 영혜가 구강기 초기의 상태로 퇴행할 때, 몸의 에너지만 잃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언어도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르네를 다시 들여다보자. 이미지에 사로잡힌 르네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영혜는 광합성을 하며 살길 바랬다. 르네는 자신의 초록빛이 가득 찬 공간에서만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식물과 초록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공통적일 것이다.      

몸에 꽃을 그린다.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만약 형부의 작업이 섹스로 마무리지어지지 않고 그것이 사회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 오히려 현실로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지 않았을까? 영혜는 몸에 나무 문신을 새기려고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사회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신병원보다 식물을 몸에 새겨 넣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되지 않을까? 폐쇄병동에서의 삶이 그녀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혜의 채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세상에 대한 혐오를 전제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시 처음부터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을까? 르네를 치료한 셰셰이에 박사는 기존의 <아버지-분석가>의 이미지를 지니지 않았다. <어머니-분석가>가 되어 그녀와 함께 초기 발달단계를 그대로 거치게 해주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남편까지 동원하여 르네에게 외디프스 단계도 제공해주었다. 이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아가 충동을 다룰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즉, 내향화된 리비도를 외향화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영혜는 결국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되어 큰 병원으로 실려간다. 생명만큼은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녀는 식물처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식물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히스테리에서 발생하는 식물 증상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신적 원인으로 일어난 히스테리 증상이 발달하면서 실제 신체손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류머티즘과 같은 뼈 질환에 히스테리의 의미를 부여하진 않지만,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로 류머티즘이 발병한다는 것을 연구했다. 즉, 이 것은 영혜의 병리적 소원성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식물이 되고 싶은 영혜는 식물인간이 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현실이 그녀 꿈의 이미지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소 아님 못먹겠어..역겨워...

 대학병원에 실려간 영혜의 나머지 삶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녀가 정신과 병동에 강제 입원된다면 이미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뇌의 작용으로만 생각한다면 처방된 약물을 투약받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그녀는 지칠 것이며 신체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식물의 이미지가 신체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어떤 폭력이 있다면, 인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자아는 외부를 향하지 않고 내면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약물보다 비타민이 나을 것이다. 약물은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자아에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지부조화 이론 등 다양한 논리를 통한 접근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경로를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뇌과학자들은 그런 설명방식을 채택하지 않는가?      


 여기서 상징적 실현이라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영혜의 자아와 세상을 구분 짓는 경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와 비자아가 혼융된 상태가 되었다. 나와 너의 구분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가 된 것이다. 자아는 약화되고 마지막에 <투사>의 방어기제만이 사용 가능하게 된다. 정신병의 활성화 시기가 이렇게 나타난다. 피아제가 이야기한 전조작기로 퇴행했다는 말이다.      


 영혜는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았다. 사물들 사이에 있었다. 그런 믿음이 망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일반화 과정을 거칠 수 있다. 상식으로 그녀의 망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논리는 형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의 강요는 무의미하게 매듭이 지어진다. 그런 폭력은 정신의학이 자주 해오던 것 아닌가? 폭력을 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서 진정으로 실현되지 않을까? 폭력적인 일상을 견디기 위해 개인은 정신병적인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질환을 두고 <걸린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선택이 현실의 좌표와 관계된다. 자아가 어떤 현실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영혜를 치료하려 한다면 재양육을 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다시 양육되지 않는다면 그녀의 욕망이 일깨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것은 곧 우리가 사는 현실이 다시 주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말과도 같다. 정신병적 현실의 좌표를 수정한다는 것. 이 것이 재양육이 되지 않을까?


나...이제 안먹어도 살 수 있어...


 여기서 르네의 삶을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혜의 경험은 르네와 비슷하지 않을까? 르네는 번쩍거리는 빛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바람소리가 광풍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덮쳐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기 속으로 도망쳐가려고 했었다. 그녀는 아무 곳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이미지들이 그녀를 습격해왔기 때문이었다. 새의 이미지를 입에 넣어서 씹고 고양이의 머리 이미지를 입에 넣어서 씹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내부에서 르네를 먹었다. 비명에도 시달렸다. 소설 속의 영혜도 비슷한 것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영혜 역시도 비현실과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식물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르네는 병원에 입원하자 체계가 더 굳건해졌다고 이야기했다. 영혜의 몸에 그려진 부적 같은 그림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들은 환영으로 주체를 사로잡으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혜의 환상은 여기서 환상으로 다시 진행한다. 현실이 사라지고 비현실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다.


 영혜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장면에서, 르네가 죽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셰셰이에 박사는 과감하게 그녀의 자살을 승인했다. 윤리적으로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정신분석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르네의 퇴행에 발을 맞추어보자. 그녀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다. 르네의 치료과정에서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사히 극복되어 치료가 되었다. 진정한 현실을 되찾았던 것이다.


 정신분석가 대리언 리더는 정신질환자의 행동이 아무리 심각해도 그것이 자가 치유의 시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강조를 생각한다면 영혜의 소망은 자가 치유의 시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신적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등장한다. 그때 등장한 죽음충동은 그녀의 리비도에 묻어서 스스로를 파괴하게끔 부추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혜 역시 그러한 죽음충동을 드러내지 않는가? 마지막 남아있는 에너지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향화된 리비도에는 죽음충동이 묻어있었다. 그것이 자기파괴로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충동이 그녀에게 묻어서 활동하기에 자아를 파괴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 아닐까? 이 것은 그녀의 자아가 병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의 병, 그것이 정신병으로 불리는 것 아닌가?


영혜는 광합성을 하고자 한다. 몸에 그려진 식물이 광합성의 매개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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