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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제국

사다는 기치조를 사랑한걸까?

by 박진우

1936년 일본. 이시다 기치조라는 남성이 살해당한다. 그의 시신에는 남근이 잘려져 있었다. 도난당한 것이다. 범인은 불륜녀인 아베 사다라는 젊은 여자였다. 상상할 수 없는 엽기적인 범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겨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독특하게 자신이 잡혔을 때 환하게 웃으면서 검거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광경이었을 것이다. 이 것이 영화 감각의 제국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다.


영화는 포르노급이다. 성기는 거리낌 없이 노출된다. 물론 삽입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야하다는 느낌을 받기가 어렵다. 무미건조한 화면이 시선의 끈적함을 차단해버리기 때문일까? 영화 후반에는 하루 온종일 섹스만 하는 장면으로 가득 찬다. 만약에 우리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 장면을 설명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몸정>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어울릴 수도 있을까?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이 영화를 포르노로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정말 쾌락만을 위해서라면 어느 지점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사다는 지칠 줄 모르고 요구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섹스를 멈추지 못한 것일까? 그녀가 어떤 신경증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가설을 미리 세워볼 수 있다. 조그마한 성적 자극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바로 해소해버리고자 하는 정신적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는 경우를 찾아보아야 한다.


즉, 그녀가 성장하면서 갖추게 된 어떤 정신적 구조가 있고, 거기에다가 성적 자극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연구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위행위를 끊임없이 하다가 신경쇠약의 상태로 빠져든 경우, 조그만 자극도 견디지 못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바로 해소해버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것은 과도한 성행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자위 중독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신경쇠약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기치조의 성적 도발에 대해서 호응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것은 남성 여성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이 될 것이다. 과도한 자위행위든 과도한 섹스든 리비도의 고갈은 신체의 쇠약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과도한 자위로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들에게 <조그만 자극조차 견딜 수 없는 운명>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사다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어도 이미 그런 운명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살아왔던 그녀 삶의 총합의 문제기 때문이다.



movie_image45EGDJ3U.jpg 옷을 입지 않은 장면이 더 많은데 이상하게 야하다는 생각이 안든다.

사다는 결혼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편의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접대부로 일했다. 사다의 남편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였다. 이 경우 그녀에게 또 다른 대상의 접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섹스 자체는 생계를 위한 단순한 몸짓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매춘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녀를 알게 된 어느 교장이 <건전한 일을 해야 한다>고 그녀의 일자리를 알선해 준 것이다. 그곳이 기치조가 등장하는 요리점이다. 교장의 말은 사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실제로 사다는 그 교장에게 연심을 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다시 일탈을 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변태증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한다.


변태증은 법의 경계에서 짜릿한 스릴을 즐긴다. 즉, 법을 <경시>하는 것이다. 사다에게 주어진 <법>의 문제는 그녀의 정신에서 별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교장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위반하는 즐거움을 누린 것이지 않을까? 그녀가 교장에 대한 마음이 있어서 그의 말을 따랐지만 그 와중에도 일탈을 즐긴 것이다.


교장이 <건전한 일>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건전>과 <불건전>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건전과 불건전은 음란의 정도 문제가 아니다. 법적인 승인의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 점을 리비도의 사용에 빗대어볼 수 있다면 리비도의 승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건전한 것이고 리비도의 격하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불건전한 것이다. 일하는 것이 승화를 일으키게 된다면 주변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화의 가능성이 차단이 되어 있는 일의 경우, 인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사다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기치조의 아내는 사다를 요리점에서 내쫓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관을 전전하면서 성관계를 멈추지 않았다. 사다가 경제적 문제로 교장을 만나기 위해 잠시 외출했을 때, 기치조는 여관 주인에게 충고를 듣는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여관을 떠나라는 것이다. 말라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기치조는 그런 조언을 건네는 노파를 성폭행한다. 자신의 성적 능력에 대해서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과도한 성관계를 통해서 그 역시 신경쇠약의 상태에 빠져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리비도가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다는 참한 얼굴을 하고 있다. 거부감 들지 않는 얼굴이다. 그런데 같이 숙소를 사용하는 하는 여성들도 그녀를 탐한다. 대체 무엇이 작용하는 것일까?


여성 대 여성의 문제에서 동성애 충동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일반 동성애 충동은 승화로 이어지면서 우정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 승화를 막는 조건이 무엇일까? 이 점은 중요하게 따져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가 아님에도 여자와 자꾸 섹슈얼한 관계로 빠져드는 여성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양성애자라는 설명은 그 이면의 문제를 가려버린다. 동성애적 행위를 원치 않아도 성적 자극을 견딜 수 없는 것 아닐까? 이 경우도 자극을 견디지 못하는 신경쇠약 반응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성애 충동은 성공적으로 승화될 수 있지만 조그마한 성적 자극을 견디지 못하는 주체가 리비도 해소를 위해 승화를 거부한다면, 섹스를 실시할 것이다.

movie_imageY25E1JD0.jpg 뭐...뭐하시나요...

<교장>은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사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의 문제를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다가 얼마나 그 직업에 종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서 성적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준비되어 있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다의 삶 전체를 고려해 볼 때, 그녀는 직업을 바꾸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질서를 변경하기 위해서 직업의 변화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다가 교장을 만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교장과 성행위 도중 때려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것을 단순하게 피학적인 섹스로 생각해야 할까?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그의 말을 위반했다는 것에서 처벌받아야 하는 충동이 내면에서 올라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그것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도덕 마조히즘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도덕 마조히즘은 그녀의 삶을 <운명>처럼 포장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순서를 다시 따라가 보자. 교장의 조언을 따른 사다는 기치조가 운영하는 요리점에 취업을 했다. 동시에 그녀는 기치조를 통해서 다시 어떤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 둘은 첫눈에 반하는 것 같이 변한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꾸준한 섹스를 한다. 여주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사다를 쫓아낸다. 아마 여기서 기치조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멈추었다면 그는 이전의 삶을 계속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잠시 오디세우스를 펼쳐보자. 오디세우스 왕이 세이렌의 바다를 지날 때,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한다. 자신을 기둥에 묶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명령을 하든 풀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귀를 밀랍으로 막았고 세이렌의 바다를 지나간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바닷사람을 홀려서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고통스러워했다. 병사들에게 자신을 당장 풀라고 지시했으나 병사들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바다를 지나는 동안 세이렌의 노랫소리로 인해서 왕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덕분에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어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bell04.jpg 오디세우스만이 세이렌의 노래를 들었다.

사다는 기치조에게 세이렌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사다에 대한 끌림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정액이 고갈되어 압통을 느껴야 하는 지점에서조차 그녀의 유혹에 응답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야 하는 것이다. 기치조가 그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그녀의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디세우스처럼 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성적 자극도 견딜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폭로는 그녀에게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기치조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욕망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포기되지 않는 욕망 덕분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섹스를 하게 된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질투의 문제이다. 질투도 승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질투의 승화는 상대방의 마음에 있는 자리를 뺏는 것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 것은 꽤 중요한 것이다. 그녀의 질투 대상이 기치조의 아내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사다는 기치조와 합법적인 관계로 까지 진행할 의향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가 성적 불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치조가 다른 여자들과 성관계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없는 대상과의 섹스만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것은 그의 법적 아내에게 남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여성의 성 발달에서 생식기의 발달을 통해 성격적 유형이 나뉜다는 프로이트의 연구를 살펴보아야 한다. 충동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느냐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성을 남성보다 복잡하게 생각했는데, 음핵에서 시작해서 질로 옮겨가는 자극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음핵에 성감이 집중되어 있을 때와 질감각에 집중되어 있을 때는 다르게 보았다. 그 특징은 어린 시절 똥의 의미와도 결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을 생각해보자. 성기관에 따라서 무의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상징적으로 해석되는 내용이다.


만약 사다가 질에서 직접적인 오르가슴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장기적인 섹스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때, 사다에게는 <남자 >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섹스를 갈망했다는 점은 그녀에게 <남자>보다 <남근>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남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음핵이 성감대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녀의 남근 선망이 행동화로 나타난 것일까?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사다의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 음핵이 어린 여자아이에게 남근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작은 것을 준 부모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 여성의 강박을 파고들 때,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동시에 드러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섹스에서 양성 변태적인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성관계는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다와 기치조는 그렇지 않다. 그 두 사람을 아예 대 놓고 옷을 입지 않는다. 끊임없는 섹스는 여관 사람들의 빈축을 살 수 있다. 심지어 사다는 <애인의 것을 하루 종일 빠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 것은 분명한 불명예다. 그러나 사다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이 것을 정말 사랑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을까? 다른 말로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고립이 되어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1.jpg 그들은 옆에 누가 있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의 섹스가 공개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정신병적 양성 변태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관계 자체가 병리적인 것이 된 것이다. 사다의 생식기는 남근을 <먹는>것으로 그를 거세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사다에게 기치조와 같은 남근이 또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동안 경험한 수많은 남근들이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치조만큼 뚜렷한 남근이 없다는 말이다. 이 것은 단순히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주변 조건들과 개인적 조건들 모두 맞물리게 되어서 발생한 것이다.


나중에 감당할 수 없게 된 기치조는 스스로 사다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두 사람이 심각한 정도의 광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사다는 기치조를 목졸라 죽인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여기서 사다에겐 기치조가 중요하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녀는 남근을 선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그의 남근을 잘라서 손에 쥐고 도망간다. 이 장면을 우리는 거세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거세가 아니라 오히려 보존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녀가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남근이기 때문이다.

movie_image.jpg 죽어도 좋아?

더 중요한 문제는 그녀가 4일 만에 잡혔을 때 환하게 웃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연쇄살인을 멈출 수가 없기에 멈춰달라고 호소하는 연쇄살인범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데, 그녀의 무의식에 자리한 내적 죄책감의 문제가 의식 근저에까지 떠올랐다는 것이다. 만약 검거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야만 했을 것이다. 남근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적 처벌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둘을 강제로 분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법적 처벌을 통해서 기치조의 남근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만약 그녀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성적 자극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괜찮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성적 자극이 차단될 때 오히려 신경증이 완화되는 부인의 사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성적 자극의 메커니즘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심리적 문제에 대한 해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다가 이런 관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될까? 그녀가 임신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그녀는 끔찍한 리비도에서 일시적 해방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적 자기 사랑이 대상 사랑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서론 연구에서 프로이트가 지적한 문제 아니었는가? 그러나 출산 이후에는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을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결론을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경험해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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