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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4. 2017

얼굴 없는 미녀

정말 그녀는 최면에 걸렸을까?

 경계선 인격장애는 예전부터 하나의 이슈처럼 기능했다. 물론 현상적 차원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관계들이 발생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지수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꽤 복잡한 방식으로 접근해오는데, 그 중간단계 과정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영상만 즐긴다고 해도 영화를 감상하는데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경계선 진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불쾌감이 불러일으켜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도 경계선 인격장애 진단은 치명적인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스스로 경계선 인격장애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단명에 대한 어두운 뒷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다. <의사들의 휴식처>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치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전제를 둘 수 있다. 즉, 치료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판단이 우선이기에 인생을 탐색하고 충동의 기원을 찾는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최면치료중인 석원

 정신과 의사 석원은 지수를 전형적인 경계선으로 진단한다. 그녀가 버림받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를 끄는 현상을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쁘고 활기차지만 언제나 혼자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 여성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녀와 만나는 사람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남자이다. 동성 친구는 주변에 없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에는 적절한 합리화도 등장한다. 그녀에게 불필요한 인연이기에 멀리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맥락에서 그 사람이 친구에게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연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진심을 다해서 사랑해준 연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슷한 정신 기제의 움직임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고립>이란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면 그 사람은 홀로 남겨지고자 하는 정신적 움직임을 나타내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더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립상태에서 등장하는 성충동의 문제다. 그 문제로 만날 수 있는 남자를 근처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만나고 즉석에서 섹스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관계는 <자위행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사랑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자기사랑>이라는 측면에서만 기능한다.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지수는 석원에게 과거를 자꾸만 캐묻는다. 그녀는 그의 과거를 탐색하려고 한다. 그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영화의 다른 평가들에서 <역전이>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수의 전략은 <역전이>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그를 <착각>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착각 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그의 욕망을 탐색하기 더 쉽기 때문이다. 곧, 그녀는 한 가지 질문을 품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남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것은 물음표의 형태로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를 치료할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욕망을 말해요. 뭘 원해요?

 그러나 그 질문에는 어떤 응답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가 찾는 것은 상식적으로 결정된 대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적발달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찾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지적발달이 지적 답안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때 암기력의 문제는 예외적인 것이다. 즉, 미리 결정된 어떤 답안을 찾기 위해서 타깃으로 설정할 수 있는 존재가 의사가 되지 않는가?


 지수는 답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미리 예측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답안은 그 시나리오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이때, 현실의 좌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도 시나리오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녀는 지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할 것이다. 대신 그만큼 감정이 억눌려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남성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찾으려 했고, 그에 따른 시나리오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석원의 과거도 충분히 들었다. 어쩌면 상담의 방식을 미리 탐색해서 상대의 욕망을 자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남성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미리 알기 위해서이다. 그녀의 시나리오가 무의식적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남성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을 것다.      


 그녀에게 석원의 존재는 치료하고자 애쓰는 사람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게 만든다. 석원이 원래 근무하던 병원을 그만둔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되어서 최면치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최면 중에 말하는 그녀의 성경험에 석원은 심한 흔들림을 느껴 그녀와 섹스를 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포착해야 하는 것이 있다. 최면상태에서 섹스를 하고 깨어나서 정말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최면 기법이란 결정적으로 초자아를 우회해서 명령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명령 자체가 초자아를 건드리게 된다면 최면을 바로 깨져버릴 것이다. 과거 일본 만화나 게임에서 최면상태의 여자 캐릭터를 능욕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확실히 말해 두는데, 피 최면자의 초자아를 건드리게 되는 행위를 한다면 최면이 깨져버릴 것이다. 유부녀인 지수가 다른 남성과 최면에 의해 성관계를 했다는 것은 사회적인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초자아 문제는 여기서 건드려진다. 따라서 지수는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8시...지금 갈게요

 영화 시나리오를 생각한다면 지수는 최면에 걸리지 않았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석원을 유혹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수를 연기한 김혜수 씨의 뛰어난 연기력은 여기서 반영되지 않는가? 최면에 걸리지 않았지만 최면에 걸린 것처럼 석원을 속인 것이다. 덩달아 관객도 속았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우리는 다 속았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역전이>를 이야기하곤 한다. 역전이 문제는 석원이 지수에게 자신의 과거를 공개한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신뢰감도 서로에게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누워서 야릇하게 자신의 성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석원에게 견딜 수 없는 성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원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석원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경우의 착각은 <사랑>과 곧잘 관련이 될 수 있는데, 자신의 모호한 믿음과 연결되면서 엉뚱한 <믿음>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 그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혜수 씨의 뛰어난 연기력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가?      


 우리는 영화 앞으로 돌아가서 석원이 상담에서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의 다른 환자는 그에게 고백하길, 아버지에게 늘 강간을 당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실이 불쾌하지만 너무 좋아서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하려고 한다. 환자와 보호자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진실공방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진행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생긴 정신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 즉, 외상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은 <외상에 따른 정신적 변화>가 되는 것이다. 만약 외상사건으로 인해서, 정신에 아무런 변화도 초래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외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어떤> 경험이 되는 것이다.    

나 최면 걸린건가요?

 상담에서 사실만을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이때, 정신작용의 문제를 간과하기 쉬워질 것이다. 상담자는 일단 수용해주고 거기서부터 어떤 정신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찾아나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때, 그런 민감한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믿음의 형태가 무엇을 위해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사실에 대한 집착은 그가 치료에 대한 무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지수는 그에게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지수는 일방적으로 치료를 매듭짓는다. 그러나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석원이 지수에게 전화를 걸자 그녀는 멍해진 모습으로 그에게 향한다. 그리고 석원의 사무실에서 격렬한 섹스를 나눈다. 그런 과정을 매일 반복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후최면 암시의 영향력으로 그녀가 석원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착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최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후최면 암시로 이 정도의 효과가 나타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그녀가 석원과 격렬한 섹스를 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데, 그 순간에 이미 최면이 풀리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훌륭한 연기 아닌가?      


 여기서 재미있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석원의 전화를 받은 지수가 그렇게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고전적 조건 형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파블로브의 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종을 치면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석원이 전화를 하면 지수가 그에게 온다. 그는 개처럼 변해버리는 것이다. 즉, 석원을 <개 같은 놈>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어느 날부터 지수가 찾아오지 않게 되자, 그는 막연히 지수를 기다린다. 그리고 술로 날을 지새우는 폐인처럼 변해버린다. 물론 그가 그녀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때, 그의 사랑은 순수 쾌감만을 바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랑이란 망상에 빠져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절대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는 어떤 피해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안와...지수가...

 석원이 지수에게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필요할까? 상담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관계에 빠지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융은 이런 관계를 견디기 위해서 그녀의 대체물을 세웠다. 사비나와 똑같은 조건을 지닌 유대인 여성 토니를 정부로 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석원에게 지수와 같은 조건을 지닌 대체물 대상이 없다는 것은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멀리 떠나는 것이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상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면 자극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 현실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석원은 지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남편이 휴대폰을 전달해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기서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지수는 출판을 하고자 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리비도 승화의 문제와 연결되면서 조금의 해소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신경증자들은 글쓰기에 다소 집착을 보인다. 글을 쓰면 다소 편안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출판할 수 있게 된다면 많이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문자에 집착하는 강박증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경계선 인격장애라고 하지만 이러한 점들이 관찰된다는 것은 강박 구조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강박증이 심각해질 때, 현실에서의 일탈된 관념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것이 <망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망상이 등장하게 되었을 때, 전혀 다른 진단명의 꼬리가 붙을 수 있을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를 생각해보자. 강박증에서 나타나는 인격의 변화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자아와 악마적 자아라고 묘사한 것은 프로이트의 <쥐 인간>이 직접 이야기한 것 아니었나?      


 정신의학에서는 경계선 인격장애가 드러내 보이는 행동화 문제로 인해서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종종하곤 한다. 그러나 모든 정신질환자들이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일종의 자가 치유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행동 역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경계선 인격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 그것이 무엇을 불러일으키는지 혹은 무엇을 느끼고 싶어 하는지의 단서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지수가 석원의 욕망을 탐색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의사의 욕망을 탐색하면서 얻어내는 지적 단서들을 통해서 자기 증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곧, 치료되길 거부한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병을 통해서 현실을 경험하겠다는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엄청난 에너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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