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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3. 2017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증상이 중요한가? 사랑이 중요한가?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문학이나 영화 역시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반영해 준다면 우리는 작품에 끌릴 것이다. 사실 아무리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만큼은 관심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강박증의 교과서처럼 보게 되는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이 영화이다. 물론 강박증을 다룬 다른 영화도 있지만 이 만큼 작품성과 재미를 보장해주는 작품이 아직까지 없다. 영화에 대해 좀 더 섬세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유달의 행동을 단순히 <강박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강박 의례>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인공 유달의 행동은 <강박 의례>라는 측면이 더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멜빈 유달. 그는 강박증 환자이다.

  유달은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가 쓴 책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그것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 소설이 <연애 소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흥미롭게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어째서 여자에게는 쑥맥임과 동시에 애인도 제대로 사귈 수 없었던 유달이 연애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그가 쓴 50여 권의 베스트셀러들은 연애경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는 강박증이 구성하는 어떤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엉뚱한 생각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이러한 시나리오는 단순한 상상 수준에서는 <망상>이라고 사람들이 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엉뚱한 생각에 대해 사람들은 망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엉뚱한 생각에 승화 작용이 들어가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각색해야 하고, 그것을 승화해야 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는 증상에 시달려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그의 탁월한 글솜씨는 그를 경제적인 성공으로까지 이끌어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생각할 수 있는데, 강박증에서 <생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이다. 생각은 종종 그 자체로 섹스의 의미를 띠는 경우가 있다. 이때 강박증자는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으로 인해서 지쳐버리기도 한다. 결국은 생각의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도 할 것이다. 유달의 경우 그 생각이 승화로 이어져서 숨 쉴 수 있는 출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될 것이다.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이러한 승화의 출구가 있다는 것은 괴로운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 일 이외의 다른 것에는 날카롭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유달이 보이는 특징적인 행동들을 관찰할 수도 있다. 그는 집 문을 열고 닫을 때 꼭 다섯 번씩 문 손잡이를 돌린다. 그리고 전등도 다섯 번씩 다시 끄고 켜는 것을 반복한다. 그가 5번씩 반복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것은 그가 무엇인가를 준비하기 전에 실시하는 <강박 의례>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행위를 종교인들의 신심을 증언하는 실천행위와 연관 지으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일상생활에 대한 사소한 조정행위로 나타나는 강박 의례는 의식에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생활에서 어떤 사소한 행위를 보태거나 규칙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실제로 강박증자의 생활에서는 이러한 조정행위들이 관찰되기도 한다.     


 그가 손을 씻을 때, 비누를 한번 쓰고 버린다. 그것도 뜨거운 물로 손을 씻는다. 이 것이 청결에 대한 문제일까? 그러나 뜨거운 물은 소독을 한다는 의미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 것은 그가 생활에서 금지된 죄악을 다시 저질러서 스스로를 처벌한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비누에는 세균이 묻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묻어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의 손 씻는 행위는 죽음을 예방하기 위한 의미를 품고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는 5개의 비누를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의 죄는 어디에서 기인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강박에서 나타나는 여러 요소들이 장악력을 갖추고 있다면 근처의 사람들에게 불편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조건들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청결과 더러움의 문제도 여기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이웃에 사는 게이 예술가 사이먼의 강아지 버델을 쓰레기장에 버리는 것을 생각해보자. 강아지로 인해 자기 주변 상황에 대한 통제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강아지를 없애야 했을 것이다. 그가 못된 사람이라서 강아지를 쓰레기장에 버린 것이 아니다.     

버델. 이 녀석!

 우리는 유달이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데, 그가 사이먼의 강아지 버델을 맡게 되었을 때,  단골 레스토랑의 지정석을 바꿔 앉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소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스스로 정한 규칙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강박 의례에 변화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는 – 외부 대상에 리비도를 투자하는 –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시체 같은 강박증자에게는 유의미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 유의미한 결과는 마치 나비 효과처럼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유달의 모든 행동이 현실의 변화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리비도 정체상태에 있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가 변화의 종착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자신의 강박 의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막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막기 위해서 미리 시체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강박증자들은 이런 모순을 그대로 떠안고 살아간다. 


 여기서, 그가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물론 리비도 승화로 인해서 발생하는 일일 수 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여자를 잘 이해하는지에 대한 찬사도 듣는다. 우리는 동시에 연애상담을 기가 막히게 잘 하는 모태솔로남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도 여성의 사랑을 늘 찬양하는 남성은 궁극적으로 혼자 남게 된다고 한다. 스탕달이 연애론을 썼지만 혼자서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 시나리오들이 실재하는 여성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기능한다면, 그는 신경증적 전략에 효율적으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혼자 살아가기 위해 사랑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잘 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결국 그것은 환상이다. 현실과 환상은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알 수 있는가? 남성은 궁극적으로 여성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없다.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달은 어떻게 여성에 대해서 그렇게 글을 멋지게 쓸 수 있었을까?


 프로이트는 강박증에서 높은 지성이 발견된다고 한다. <쥐 인간>의 치료 예후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것의 근거로 그것을 지적했다. 심지어 그 말을 직접 자신의 책에 쓰기도 했다. 그 높은 지성 덕분에 망상의 문제까지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정신분석 과정에서도 증상이 악화되면서 이러한 내용이 등장할 때가 있다. 그 시기는 분석 초기에서 초기 말의 시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쥐 인간이 망상을 드러낸 시점이 그랬다. 쥐 인간의 망상이 현실에서 이탈된 내용이었다면, 그것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일반원리를 발견하려고 했을 것이다. 유달의 연애소설은 그런 망상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낭만적인 색깔을 지니고 있다면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연애소설은 그의 강박 시나리오의 집합체일 것이다. 혹은 자기 행동을 모두 시나리오화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설명이 탁월할 수 있기에 훌륭한 소설이 된 것이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서 강박 구조는 의외로 많이 발견될 수 있다.     


 강박 시나리오는 주변의 삶의 모든 것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꾸밀 수 있다. 모태 솔로 남성이라고 할지라도 주변의 정보와 환상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이해를 꾸밀 수 있다. 이해하는 <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 여성을 대면하게 되면 곧바로 위축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것은 남성과 여성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접점일지도 모른다. 그 접점을 접착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뢰> 아닌가? 강박증에서 자주 관찰되는 <사랑 의심> 이 신뢰의 문제로 극복이 된다. 신뢰가 없다면 의심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게 드시면 좋지 않아요

 유달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식당에서, 정해진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일회용 포크와 나이트도 가지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 위치에는 늘 그의 까다로움을 견뎌주는 캐롤이라는 웨이트리스가 항상 있었다. 유달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면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위치에 늘 머물러 있는 여성이란 누구일까? <아내>가 그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그의 정신에서 이미 자신의 <아내>의 역할이 포함된 환상 시나리오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캐롤이 잠시 웨이트리스를 그만두었을 때, 유달이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는 그녀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유달의 변화 과정을 진지하게 지켜보자. 그가 쓴 텍스트는 그를 혼자서 머물게 만들었다. 반면 그의 증상은 그 텍스트를 통해 수동성의 승화로 이어졌다. 이 것은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증상과 현실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해주지 않는가? 우리는 이 지점에서 유달이 엄청난 경제적 성공의 혜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자서 살 수밖에 없는 근거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이먼

 조금 더 나아가 보자. 그는 게이 예술가 사이먼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 들은 지속적으로 나쁜 관계를 유지하게 될 수 있었다. 유달이 친절하게 굴지 않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대하면 유달의 강박 의례가 무너져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로 버델이 기능한다. 버델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되는데 이 것은 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강박증에서 변화를 원치 않지만, 변화를 수용하게 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신뢰감이 일어났기 때문에 변화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곧 들이닥칠 불행한 일을 걱정하면서 강박 의례를 실천해야 했던 유달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사소한 관념으로부터 시작해서 괴로움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더 이상 괴롭지 않기 위해서 방어기제를 동원한다. 강박 관념이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보호 조치로 선택된 것이 강박 의례이기 때문이다. 그 보호 수단을 흔들어 놓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의 문제는 현실적인 불행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결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증상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박증자에게 삶의 변화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몸이 아파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게 그의 시체 속성이 어떤 식으로 깨어지느냐에 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시체는 아프지 않아서 편안하게 잠들지만 사람은 아파서 편하게 잠들 수가 없지 않은가?


 이때, 강박증자는 두 개의 선택에서 갈등할 수 있다. 이때의 선택은 <질서>를 의미한다. 끔찍한 고통을 견뎌내면서 다시 활기를 찾는 <질서>로 돌아가서 생기 있게 사느냐 아니면 예전의 증상이 부여한 실패를 향한 <질서>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더 이상의 고통을 원치 않는다면 <실패>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 상식 이상의 선택이 존재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여기서 강박증의 일반 충동의 문제다. 강박증자는 건강보다 병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은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사랑 아닐까? 자신의 현실적인 불행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견뎌내는 사랑은 강박증에서 최고의 치료가 될 것이다. 이 것이 모든 신경증자들이 바라던 치료방식 아닌가?  그러나 감당해야 할 고통이 있을 때, 신경증적 만족과 정면에서 충돌할 수가 있다.    


 병을 선택하는 특징은 신뢰관계를 형성하는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심지어 강박증의 주요 기제로 선택되는 것이 <사랑 의심>이라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강박증으로 인해서 의처증 혹은 의부증이 발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상대의 확신을 보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비열함에 끌리는 상태가 되어 사랑에 대한 확신을 보기 위해서 노력할 수도 있다. 그들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병을 선택하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강박증자가 사랑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상에 대해서 만큼은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신경증의 문제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강박증자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질문 때문에 언제나 사건이 사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강박증의 치료로 증상을 히스테리 화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히스테리자는 생명의 문제로 인해서 사물이 언제나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둘의 상이한 받아들임의 방식이 동일시를 통해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증상은 나아질 수 있다.    

가서 재밌게 놀자구

 캐롤과 유달, 사이먼은 여행을 떠난다. 마침내 캐롤과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데이트 장면에서 유달은 애를 많이 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캐롤을 위해서 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치료제를 복용했다. 그래서 좀 더 나아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의를 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 약물은 증상을 억누를 수 있게 돕지만 치료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강박증자들의 특징 중 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아무 때나 갑자기 내뱉을 수 있다. 그는 캐롤에게 속삭여줄 달콤한 말을 사이먼과 캐롤 사이에서 발생할 어떤 사건에 대한 가설로 내뱉는다. 이 것은 분명 그의 강박이 심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상대에 대한 속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뱉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발생하는 오해는 심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그런 실수를 하고 캐롤이 사이먼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물론 사이먼은 캐롤에게서 영감을 얻어서 그림만 그렸지만) 사랑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 덕에 그는 그동안 해오던 강박 의례들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리비도 작용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자기만족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만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아닌가? 그냥 나를 아껴주기 위해서 몸 사리는 것이 오히려 신경증에 다가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강박 의례는 자신의 불행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 불행이란 궁극적으로 <죽음> 아닌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사랑을 잃은 남자에겐 <죽음>이 차라리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유달은 그런 글을 소설에서 직접 썼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그의 글을 경험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 것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 될 것이다. 그가 캐롤에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환상으로 꿈꿔오던 것들이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언어를 잊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미래의 가능성은 현실과 마주하면서 옅어진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좀 해봐요. 당신 멋있어요

 그가 해오던 강박 의례가 사랑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말해주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 것을 두고 사랑에 의한 치료의 한 단면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진정한 불행의 문제에서 강박 의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캐롤로 고민하는 유달에게 사이먼은 조언한다.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라는 것이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의 말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의미는 그동안 지켜만 보던 환상을 실제로 되돌리라는 명령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사랑이라는 환상 시나리오를 이제 현실화시키라는 말이다. 늘 의심에 사로잡혀있었던 유달에게 생겨난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는 그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는 고립에서 자력으로 탈출하려는 것이다.      


 시간의 촉박함은 강박 의례를 수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불행을 예방하기 위한 강박 의례를 수행했다. 그러나 캐롤을 잃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불행이라면 강박 의례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이었다. 미래를 위한 의례는 현재의 불행을 방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박에서는 이런 식으로 시간이 기능하지 않는가? 사랑이 증상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유달은 강박 의례보다 캐롤을 보러 가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 해야만 한다.

 유달에게는 리비도 만족이 억압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음악과 글쓰기가 그의 숨구멍을 틔여 주었다. 덕분에 그는 강박증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등장하게 되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의심>의 효과는 힘을 잃어버렸다. 이때, 그는 강박의 일반 충동도 벗어난다. 병이 아니라 건강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사랑에 의한 치료>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복잡하게 생각해서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설명하자. 다른 사람을 사랑함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는 결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것이 개인을 더 건강한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새벽 3시에 갓 구운 빵을 사기 위해 가게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빵 냄새란 무엇을 의미할까? 냄새와 신경증 사이에 어떤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루시 분석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녀는 궁극적으로 사랑문제로 인해서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유달과 캐롤이 빵 냄새를 맡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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