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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2. 2017

인터스텔라

자아와 지적 발달

 지구가 한계에 도달한다. 인간은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을 찾기 위해 우주를 탐사한다. 이 것이 영화 인터스텔라의 배경이다. 우주를 탐사하기 위해서 정교한 과학적 지식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영화를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두고 영화적 현실이라고 말을 붙여도 괜찮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을 정신 분석하는 것에는 이러한 영화적 현실이 반영한다고 생각한다면,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명대사를 한번 생각하면서 글을 시작해보자.

 우리는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영화에서 웅장하게 연출된 블랙홀의 존재를 볼 수 있다. 충분히 무겁고 조밀한 별은 중력장이 매우 강해서 빛이 그 별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볼 수는 없지만 중력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블랙홀을 빠져나가는데 아슬아슬하게 실패하는 광선들의 경로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사건의 지평선을 우리 정신에도 어느 정도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저 빛이 사건의 지평선인가?

 우리가 어떤 일을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실패하게 되는 경우를 두고 <작심삼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신에서도 이러한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그러나 자신이 어떤 영향력에 의해서 자꾸만 같은 상황을 반복하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것은 지적발달의 문제와도 관계가 지어질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우리가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던 것이 사실상 지적발달의 문제로 인한 것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지적 발달이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암기력이 좋다고 해서 지적발달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강박증은 블랙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신경증이다. 강박증이 시간과 맺는 관계 때문이다. 특히 시간 지연의 문제는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데, 이 것이 모든 진행을 막는다. 덧붙이자면 반복 강제의 형태도 더불어 작용한다. 우리가 <작심삼일>로 비유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반복 강제의 영향을 설정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반복 강제의 영향력은 우리 주변에 <사건의 지평선>처럼 자리 잡고 있다. 같은 행동의 반복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 존재가 가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 쿠퍼의 여정을 통해서 <자아>의 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아의 궁극적인 기능이 <생존>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터스텔라의 영화 내용 역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시도 아니었던가? 자아는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가능성 있는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그래서 우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우리는 그 행성들의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밀러와 만 행성, 그리고 블랙홀 이 세 행성에서는 정신 장치에 비유할 수 있는 특징들이 골고루 발견된다.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과도 같았다. 이것은 강박증의 지연 효과의 의미와 일치할 것이다. 강박증에서는 시간을 무척 많이 지연시키는 효과가 등장한다. 이 효과로 인해서 어떤 일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효율이 급감하게 된다. 혹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반복 강제의 효과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화를 견디려 하지 않는다. 과거의 욕망에 머물기 위해서다. 주변의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어난 다면 견디지를 못한다. 강박행동을 하지 못한 강박증자를 가정한다면, 그는 견딜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밀러 행성의 시간은 흥미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데, 아무 할 일 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빠야 하는 강박증자를 떠올리게 만들어준다. 얼마 안 있었다고 착각해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것으로 느낄 수 있다.     

밀러 행성

  그들은 2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그다지 성과도 없는데 시간은 그렇게까지 흘러간 것이다. 이 것은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버려서 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다시 <만> 행성으로 이동하는데 그곳에서는 더 특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라는 자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곳의 자료들이 온통 조작되어 있었다. 만 박사는 살아남고 싶어서 자료를 조작한 것이다.     


 생존은 자아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살아남고 싶어 한다. 만약 정신병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자살을 소망하며 온전한 죽음을 바라거나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왕이 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 박사는 그러한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오히려 살아남고 싶다는 소망만이 강력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배신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쿠퍼를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만 박사가 치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그가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 행성에서. 만박사를 깨우기 전

 새로운 대지에 한 걸음 내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생존을 위해서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대응을 하지 못할 때, 적응장애라는 말을 붙이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명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 쿠퍼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난 이후의 장면을 떠올려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영화의 처음과 이어지는 <고리>를 만들어 낸다. 그곳은 5차원 공간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모두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시간들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모두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영역이 5차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사건은 의식에서 망각의 과정을 거치지만 무의식은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설령 모순된다고 할지라도 나란히 존재하게 만든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의식은 가설의 문장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영화의 명대사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근대를 열어준 데카르트의 명제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가 코기토 문제를 제시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었다. 그리고 자아의 문제는 근데에서부터 현대까지를 이끌어 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열광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성의 중요함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캉은 신경증을 두고 하나의 질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신경증이 질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신경증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서 방황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있다.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자아의 지적발달 아닌가?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스스로 카우치에 누웠다. 그 누가 프로이트를 분석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타 다른 분석가들 역시 그렇다.

 분석가 양성이 이뤄질 때, 전문가를 찾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다. 직속 선배에게도 분석 못 받는다. 동기에게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양성 분석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기 분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했다. 이 것은 그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분석의 궁극적인 종결이 스스로 분석하고 치료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지점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것은 내담자의 지적 발달을 통해서 스스로 독립하라는 메시지 아닌가? 물론 대부분의 신경증자들은 이런 지적 발달의 문제를 간과하고 스스로 증상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증상에 잠식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의 답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정신분석>이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정신분석은 그 답을 질문자와 함께 찾아간다.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찾는데 공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경증자들은 자신의 생애를 온통 뒤져서 모든 사건을 알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서 적용하고자 한다. 지적발달의 문제가 여기서 멈춘다.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지적발달 아닌가? 프로이트는 자기 문제를 스스로 분석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의식이 의식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것은 증상이 어떻게 발달하게 되는지와도 관계될 것이다. 삶 속에서 질서의 형태로 기능하는 것들이 의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잘 만들었구나. 머피

 인간에게 적용되는 모든 학문들은 그에 준하는 질문들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의학이나 심리학과 같이 인간을 다루는 학문에는 특별한 지위가 부여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사람이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의 질문은 어떤 형태로 등장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증세로 나타날지, 일상생활이 될지, 행동이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설명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작정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아의 기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데, 인류의 생존이라는 과제에 그 답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은 초자아나 이드가 아니라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들의 평가 역시도 자아가 처리하는 것이다. 이 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아가 할 일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주변의 단서를 통해서 적응하고자 할 것이다. 그것도 자아의 기능에 해당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신경증으로 인한 저지-자아 효율 저하-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쿠퍼와 머피가 서로 갈등을 다뤄가는 것은 의미심장한데, 아버지가 찾아 나선 질문에 대해서 딸이 그 답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외디프스적인 어떤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나면서 물려받는 것은 신체적인 DNA만이 아니라 그 존재도 물려받는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게 되지만 딸은 무엇을 짊어지게 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딸이 속죄를 책임질 수 있을 가능성이다. 아들은 반복해야 하지만 딸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있는 답을 찾을 것인가? 새로운 답을 만들 것인가?

 머피는 아버지처럼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만들었다. 대지의 어머니인 가이아가 되어서 새로운 생명의 터전을 만들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토마스 딜런의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마세요>라는 시를 새로이 독해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슬픔의 언덕 위에 올라 있는 나의 아버지여,
이제 당신의 굳센 눈물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해주기를,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마세요. 
꺼져가는 불빛에 저항하고, 저항하세요    



 우리는 이 시를 읽을 때, 글자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상징적인 문장에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해석을 들이밀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 방식을 통해서 상대방의 꿈을 추론하거나 행동의 의미를 추론해서 대상의 욕망을 탐색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탁월한 방식은 그 행간을 보는 것이다.     


 만약 이 시의 해석을 프로이트에게 맡기게 된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한 구절 한 구절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가 히스테리 연구에서 말했듯이 한 가지 증세를 해결하는 것이 신경증의 전체 구조를 다루는 것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은유적으로 쓰인 이 시의 해석 역시도 마찬가

지 일 것이다. 증상은 시처럼 압축되어 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토마스 딜런의 시구에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과제로 던져볼 만한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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