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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2. 2017

미스터 존스

무엇이 더 가치로운 것일까?

  만약에 의사와 환자가 연인 사이가 된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 수 있을까? 직업윤리라는 말로 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런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전이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다른 문제도 존재할 수 있다. 신경증의 목적과도 관련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은 결코 낫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 마치 해바라기 같은 모습으로 상담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치료를 갈망하지만 치료의 정 반대 대척점에서 기능한다. 이 것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녀가 아무리 상담을 자주 받고 많이 받아도 행동 자체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치료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동시에 증상은 더 악화가 되는 것이다.    


 여자 상담사와 남자 내담자가 연인관계로 발전할 높은 가능성을 띠고 있다면, 애인을 찾기 위해서 이성 상담자를 찾아 방황하는 신경증자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육체적인 쾌락보다는 정신적인 교감이 필요한 상태일 수 있다. 정신적 교감이 없다면 그 관계에서는 만족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잠자리를 한다고 해도 공허감만이 가득 찰 수가 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여성 정신분석가들이 왜 아동정신분석으로 많이 진행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적 욕망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곤란을 경험할 가능성이 남성 분석가보다 훨씬 높기 때문일 것이다.     

존스와 리비박사

 주인공 존스는 섹시하고, 심지어 돈도 잘 쓴다. 아무나 유혹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큰돈도 그냥 줘버린다. 이 것이 영화적인 각색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한 달 월급을 그냥 다른 사람에게 무상으로 줘버린다든지 하는 경우들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가족이 곤란함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사건들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존스는 병원에 입원한다. 비행기 소리를 듣고 날아가고자 했다. 그는 날고 싶었을 것이다. 이 상태를 단순히 기분이 고양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느끼고 싶었던 것은 <해방감>이다. 조증 환자가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을 때, 노리는 것이 이것 아닌가? 단순히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지는 수준으로 조울증을 설명할 수가 없다. 기분의 변화가 증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행기 소리는 <위험한 일을 하라>는 유혹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해방감을 느낄 때가 되었다는 <신호> 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곳에서 날아가려는 시도로 그 <신호>에 <응답>하는 것이다. 해방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는 조치가 필요하다. 존스는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에서 존스의 정신병력들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최초 진단명은 편집성 정신분열이었다. 그러나 그를 담당하게 된 리비 박사는 존스의 진단명을 수정한다. 그는 편집성 정신분열이 아니라 조울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진단은 정신의학 고유의 진단법일 것이다. 따라서 DSM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현상에 따르는 진단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적 진단에서는 기분이 증상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세세한 일상생활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조울 현상을 이끌어내는 심리구조를 파악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실제로 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들과 분석을 진행하다 보면 강박증의 구조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 발견되곤 한다. 강박행동도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기분변화가 조증과 울증의 수준이 아닐 때도 있다. 조울증이라면 해방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할 것이다. 트라우마의 문제로 인해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는 주먹구구식의 진단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폐쇄병동의 환경은 그런 해방감을 억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 최악의 사태를 방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여기서 문제는 발생할 수 있는데, 증상은 자아와 다른 자리에 있지 않기에 일시적으로 그 흔적을 숨길 수가 있다. 따라서 치료되었다고 믿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특징적인 장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리비 박사가 존스에게 조언하는 것이다. 조증의 상태가 지나가게 되면 울증의 상태로 접어들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한다. 이 것은 리비 박사가 임상수련을 통해서 익힌 것이다. 문제는 그전까지 존스가 우울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존스가 우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이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상담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단어다.

 단어를 배우면서 증상이 형성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존스와 리비 사이의 전이가 이미 강력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비 박사의 말이 그에게 증상을 일으킨 셈이다. 이 것이 중요한 것은 존스가 말에 의해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쉽게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존스의 행동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조울증에 심각하게 시달리는 사람들이 곧잘 하는 말이 있다. 경조증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과도한 사고도 치지 않고 힘이 남아돌며 심지어 일상생활에서 높은 효율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런 활성화된 상태는 그리움을 남길 수 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방의 기쁨은 너무나 강력하게 슬픔과 뒤섞인다.
자기가 빠져나온 감옥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해방 상태가 지나고 울증이 오는 것에 가장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을까? 다시 울증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스스로가 빠져나온 감옥의 궁극적인 의미는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것을 대상 사랑으로 전환시킬 수만 있다면 신경증자는 건강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자기 사랑에 매몰되는 경우 울증 상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존스는 병원에서 리비 박사에게 상담을 받는다. 그 상담은 하나의 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리비 박사는 상담의 과정을 모두 촬영하기도 하는데, 이 것은 약물 조절을 위해서 녹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약물을 쓰니까 어떤 변화가 관찰된다는 말이다. 일종의 약물 모니터링 시스템이나 마찬가지다. 이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상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담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현대의 정신과 전문의 들은 생물학적 관점만을 강조한다는 것을 접할 수 있다. 약물이 상담의 전 과정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경우 에는 기분이 대부분의 증상으로 인정된다. 증상 전체가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다.     


 우리는 편집증자들의 망상에서 곧잘 등장하게 되는 카메라 문제를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스스로가 누군가로부터 관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메라의 관찰은 긍정적인 기능으로 작용할 수 없다. 오히려 방어적인 태도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스의 최초 진단명이 편집 정신분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의 망상에서 카메라가 등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메라의 존재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리비 박사는 병동에서 환자에게 공격당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그 위기에서 존스가 지켜준다. 도움을 받은 리비 박사는 존스를 더 적극적으로 도우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존스가 종종 언급하는 그의 죽은 여자 친구 엘렌에 대해서 사적으로 조사하기까지 한다.  그는 분노한다. 자신이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려진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만약에 어느 환자가 치료사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상담자료를 그대로 옮겨서 상담을 이어서 재개할 수는 없다. 이 것은 정신질환에서 진실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되는데, 상담사 사이라고 해도 환자의 비밀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역으로 치료사가 환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어도 반대로 겁에 질릴 수 있다. 대신 이것들은 또 다른 억압의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다. 정보의 양은 상호 간에 깊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악화된다는 단서로 기능할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의 진실을 덮기 위한 가장 자극적인 단서로 적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리비 박사는 증거를 찾았고 진실을 알려주었다.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상당한 불쾌감이 수반될 것이다. 증상이 전형적인 경우라면 자유를 외치면서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등장할 수 있다. 증상의 극복이 유쾌하게 매듭지어질 수 없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차라리 병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존스와 리비 박사의 사이에서 일어난 불쾌감은 곧 형태를 바꾸게 된다. 그들은 성관계를 가지게 된다. 두 사람의 치료 관계는 여기서 끝장이 난 것과 마찬가지다. 그 덕에 리비 박사는 12년의 전문의 커리어를 던져야만 했다.     

감정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식의 사랑에서 특별하다는 것을 전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이로 인해서 일어난 사랑이 일반적으로 맺게 되는 사랑보다 특별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 신경증적 의존관계가 발생한다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결과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개인적 차원에서 충분히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사랑은 증상에서의 해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존스는 다시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해방감을 느끼려고 시도한다. 그런 그를 찾아간 리비 박사는 날개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두 사람은 평범한 연인의 모습으로 영화는 매듭지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한의사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여자 환자가 한의사를 찾아왔다. 도저히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맥을 짚었다. 치료 가능성에 대해서 그 의사는 확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 환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아내는 그것으로 건강해졌다. 우리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사랑의 기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불안이 신체의 증상에 스며들어 병 자체를 심각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미 불안신경증을 논하면서 이 사실을 지적했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불안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고질적인 신체적인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증상이 심리구조와 긴밀한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심리상담은 병의 호전에 꽤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존스는 낫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리비 박사는 커리어를 무너뜨리고 그를 선택했다. 우리는 그들이 아주 허무하게 헤어지게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다. 혹은 사랑을 매듭짓기 위해서 결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여전히 의사 – 환자의 모습일 때, 그들의 관계가 매듭지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이렇게 열린 결말로 생각해보자. 무엇이 존스에게 해피엔딩이 될까? 그리고 리비 박사의 입장에서 해피엔딩은 무엇이 될까? 더 중요한 질문은 여기 있다. 두 사람의 해피엔딩이 일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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