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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2. 2017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운명이라는 이름의 신경증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고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극찬이 있었고, 수없이 많은 공연이 있었다. 말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까지 개봉했다. 우리는 이런 훌륭한 작품을 연극에서도 만날 수 있다. 현대의 극작가들은 이 작품을 새로이 재해석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블랑쉬가 어떤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보통 <히스테리성 인격장애>라고 설명하는 인터넷의 글들을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의 진단기준들을 살펴보자.

      

주목받지 못하면 불편하다.
성적으로 유혹적이거나 자극적이다.
감정표현이 피상적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 외모를 이용한다.
연극적인 방식으로 말을 한다.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한다.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다른 사람과 실제보다 더 친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진단기준을 보면서 모호하게 느껴졌다. 물론 히스테리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히스테리에서는 성적 혐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생각을 좀 다르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점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남자들을 찾아 헤매는 히스테리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나타나는 블랑쉬의 행동을 이것으로 설명해도 괜찮을까? 신경증이 중층 결정 원리 하에 발병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즉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히스테리성 인격장애라는 단일한 진단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신분석의 진단이 정신의학적인 진단과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관점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블랑쉬의 행동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비슷한 임상을 주변에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쳐도,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신경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과거에 잠시 알았던 어느 여자애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당시 그 아이는 갓 스물이 되었고 예뻤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한동안 자해하는 것을 말리기 위해 몇 번 만났었다. 그것도 그녀 남자 친구의 부탁이었다. 직업 군인 신분이었던 그 남자는 여자 친구가 계속 자해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있어서 부대에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녀는 매번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상처가 낫기 전에 다시 자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진정이 되었을 때와 광기를 띠는 순간이 완전히 달라졌었는데, 진정이 되어 있을 때는 착하고 귀여웠다. 그러나 광기를 띠는 순간에 그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리고 눈이 커져서 마치 <석상>처럼 보였었다. 이 영화는 나에게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기도 했다.     

역에  도착한 블랑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고
여섯 정거장을 가면 엘리시안 필즈라던데요     

 블랑쉬는 결혼한 동생 스텔라가 사는 엘리시움으로 간다. 만나자마자 서로를 무척 반가워한다. 가족이니까. 그런데 스텔라를 대하는 블랑쉬의 태도가 좀 묘하다. 스텔라가 말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자기만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꼭 무엇인가를 사전에 숨기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마치 질문받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태도 같았다. 스텔라에게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질문을 받을 때,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가 <나폴레옹 법>에 대해서 질문하고 그녀의 재산 문제를 거론하는 순간에도 엉뚱한 이야기로 미끄러져 나간다. 결국 블랑쉬는 서류들을 모두 확인시켜주며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녀는 자신이 처해진 현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      

블랑쉬와 밋치

 스탠리의 친구, 밋치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밋치는 블랑쉬에게 연애감정을 드러낸다. 사이가 좋을 때, 그는 블랑쉬의 모든 말을 믿었을 것이다. 노총각에게 아리따운 아가씨의 말은 분명 매혹적으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블랑쉬에게 숨겨진 여러 가지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그녀에 대한 거부감이 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더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의 육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을 숨기면서 신뢰를 형성할 수 없는 그녀의 태도가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이다. 성적 가치가 신뢰를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녀가 진실을 요구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 역겨움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블랑쉬가 프랑스가 개척한 남부 귀족 태생의 미국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녀는 귀족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였다. 비록 집안이 몰락하는 비극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녀는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우아함이라고 말을 쓸 때는 그것이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블랑쉬가 드러내 보여주는 우아함의 가치는 지성이 높다는 의미가 되지 않았을까? 이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아함의 좌표와 조금 어긋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뛰어난 지성을 통해 우아함이 위장되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지성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다소 <남성적>인 특징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자기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이다. 그녀의 진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사실 아래 기묘하게 변형된 진실을 숨겨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블랑쉬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이 말은 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 수가 있다.      


  여자의 절반은 환상, 마법     

 이 것은 결코 진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태도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정신에서 절반이 환상과 마법으로 기능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무엇으로 구성될 수 있을까? 문제는 이 지점에서 심각해진다. 남자는 여자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블랑쉬는 상대의 욕망을 자신의 지성으로 탐색해서 그에 맞춰주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 과제의 결과는 무엇이 될까?


 그녀의 절반이 환상이라면 절반은 상대의 욕망이다. 이 것은 로렐에서 블랑쉬가 어떤 일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한 단서로 기능할 수 있는데, 상대방이 자기를 자주 찾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감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발달해야 하는 기능이었을 것이다. 

욕망하지 않는 자가 살아갈 수 있는가? 그래서 욕망에는 끝이 없다.


 문제는 블랑쉬가 상대의 욕망을 탐색하는 방식을 너무 과도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스탠리에게도 밋치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욕망을 탐색한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사전 방어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것은 그저 싫은 것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더 이상 친절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 상대의 말을 막을 수 있다면, 아무런 단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블랑쉬가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 점 아닐까? 결국 상대의 욕망을 미리 탐색해야 하는 블랑쉬는 그 지성으로 상대를 사전에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곧,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휘두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과연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 우리는 과거에 정신의학이 히스테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피에르 자네의 연구에서 히스테리가 정신의 통합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정신의학 역시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설명이 불충분해진다. 블랑쉬가 상대를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지성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리한 상태이다.      


 우리는 착각할 수 있는데, 신경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인지능력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은 정신병을 두고 위험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범죄를 저질러도 인지를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머리가 영리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자. 프로이트는 심각한 강박증에 시달리던 <쥐 인간>의 치료에서 아주 긍정적인 결과를 예측했었다. 그의 지성이 탁월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지 말라구!

 우리는 영화에서 스탠리가 블랑쉬를 괴롭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것들은 블랑쉬의 교묘한 노림수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랑쉬는 스탠리를 피하려 하지 않았고 그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탐색하려는 시도를 한다. 스탠리에게 계속적으로 말을 걸어서 그에게서 단서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친해지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추상적인 진실의 영역에 대한 응답을 얻어내려고 할 때, 블랑쉬의 의도대로 해주지 않는다면, 즉, 블랑쉬가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대로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점은 남성에게 상당히 짜증 나는 상황에 마주하게 만드는데, 상대를 큰 타자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방해 작업을 일으킬 수도 있다. 즉, 관계의 승화를 막는 것이다. 블랑쉬가 나타내는 이 전략은 상당히 애매모호해서 입맛에 맞춰준다고 할 지라도 큰 타자가 되기도 되어주기도 어려운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상대를 장악하고자 하는 소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법이 없는 상태를 만든다. 신경증의 병리적 전략이다.      


 이 관계를 승화로 이끄는 방법은 꼭 하나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관계를 끊어버림으로 각자의 길을 가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리비도의 출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연인이 이런 관계에 매여 있다면 불안증에 시달리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리비도의 출혈로 인해서 서로가 어떤 상황을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신경증적인 반복 강제가 적용될 수도 있다. 헤어지지 못하고 떠나가지 못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할 수도 있다. 그것을 사랑의 한 측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병리적인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블랑쉬는 중요한 말을 한다. 그녀가 말하는 뉘앙스는 어쩌면 리비도의 색채가 그대로 묻어 있어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 불쾌감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극적인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래서 별로 의미 없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말에 다양한 의미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사실을 원치 않아요. 난 마술을 원하죠. 네, 그래요, 마술.
난 사람들에게 마술을 걸고 사실을 말하지 않죠. 뭐가 진실이어야 하는지를 말하죠.
그게 죄라면 벌을 받겠어요.     

 우리는 일종의 시나리오를 가정할 수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그녀가 추구하는 진실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상대는 정해진 답변을 통해서 그녀가 만들어놓은 정체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답은 정해져 있다. 상대는 대답만 하면 된다. 이 것은 우리가 <답정너>로 언급하는 내용 아닌가?

 블랑쉬 역시 시체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의 매력으로 인해서 상대의 생명력을 빼앗는 기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의 판단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그녀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니까. 어쩌면 사실이 유일하게 그녀의 명예를 침범하는 불편한 진실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그녀는 자기 행동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주변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블랑쉬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상황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의 망상을 발달시켜 나갈 수 있다. 그 망상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에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현실의 좌표가 변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블랑쉬의 대사를 살펴보게 된다면 환경의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과정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블랑쉬의 행동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에는 언제나 한계점이 찾아오게 된다. 따라서 상식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블랑쉬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블랑쉬가 영어 선생님을 하던 시절에 17살의 소년을 사랑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녀의 정신에서는 사랑으로 기능한 것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선생이 학생을 건드린 것이다. 이 내용은 그녀가 16살 시절에 좋아했던 소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내용이다. 블랑쉬의 시간이 그곳에 멈춰있다면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이미 유년의 욕망이 이미 도래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경증의 내용 아닌가? 즉, 블랑쉬에게는 이미 증상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소년을 통해서 유년 시절의 욕망을 재현했다는 말이 된다. 그 이야기는 어떤 진실을 내포하는데, 그녀가 광기를 지닌 채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이유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것을 애정결핍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정신질환이 결핍의 이미지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유층이나 사회지도층에서도 곧잘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누나 로즈메리 역시도 정신질환으로 인해서 전두엽 절제술의 희생자가 되었고, 많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정신질환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 외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서 정신질환의 문제가 등장한 다는 것을 볼 때, 정신질환에 이러한 결핍의 이미지는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경증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개인의 내적 갈등에 투자되어 있는 에너지는 포기되지 않기에 그것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참여의 주체는 당사자이다. 어떻게 현실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의 결과로 신경증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만한 에너지를 신경증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는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지금봐도 멋있는 말론 브란도.

 블랑쉬는 스탠리로부터 강간을 당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랑쉬의 이전 생활과 강간이 서로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블랑쉬를 님포매니악으로 폄훼하기도 한다. 그런 오해는 하지 말자. 블랑쉬가 접대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상황에 살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살아남기 위해서 현실적 조건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늘 처하기 마련이다. 만약에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보다 병을 선택하는 충동의 문제가 등장했을 때, 경제적 실리가 병을 대신했을 것이다. 


 블랑쉬를 강간한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줄 수가 있는데, 이 것은 신경증이 언제 심해질 수 있느냐라는 것과 관련이 된다. 신경증자의 경우 어떤 수술 이후에, 즉, 외부세계의 그 어떤 것이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게 되면 이전보다 훨씬 심각해지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은 반대다. 수술 이후에 상태가 훨씬 괜찮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것은 원래의 자기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 외부의 이물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이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여기에 감정적인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신뢰감이 없는 것이 신체에 침범해 들어오게 될 때, 신경증은 그것을 방어해야 하며 정신병은 그것을 신체의 일부로 재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강간사건이 블랑쉬가 경험하는 정신질환의 범주를 살펴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라면 그녀는 신경증 구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최초의 만남에서부터 변화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녀가 상황을 장악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즉, 그녀는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서 언제나 그에 따르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언제나 대상을 탐색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신경증 초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살풋 드러낸다. 그녀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순간일 테니까. 아무런 걱정할 것 없이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시기였을 것이다.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신경증의 형태를 빌려야 했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운명이라는 삶의 형태를 띤, 기묘한 신경증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그녀에게 계속된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까?      


난 언제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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