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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22. 2017

키다리 아저씨

아낌없이 주는 나무

 사랑에도 단계가 있을까?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사랑에는 상호성이라는 기본 전제를 두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에는 대상을 향한 충동이 중요하다. 그 사람을 향해서 나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충동이 가장 첫 단계가 된다. 물론 충동 자체는 좌절될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다.


 그다음 단계를 두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이 있고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 서로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문제로 진행될 수 있다. 한자의 글자를 파자해 보면서 상호성의 유래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자 <사랑 愛>의 부수가 <손 手>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주고받으면서 싹트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남성의 사랑은 전형적으로 준다는 관념 하에서 형성된다.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적인 연애 테마를 하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들이 바람을 피워대는 이유는 마음속에 방이 많고 여자는 방이 하나뿐이라서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물론 옛날이야기이긴 하지만 충분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마음속에 자리를 내어 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자리가 무척 크기 때문이다. 남자가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방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남자에게 방이 많다는 말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반박될 수 있다. 한 군데 정착을 못하니까 여관을 떠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남자의 주는 태도는 종종 엄청난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게 되면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 줄 수도 있다. 괜히 유흥업소에서 엄청난 돈을 탕진하게 되는 남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옆에서 보면 멍청해 보일지는 몰라도 사랑이 남자에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데이트 비용을 감당하려 하는 남자들은 다소 자기가 무리를 하더라도 좋아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이 영화의 제목에서 J. 웹스터의 아동문학 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후견인이 있다는 것은 은근히 로맨틱한 일이다. 주인공 영미는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남모르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그녀의 경제적 곤란함을 모두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금액도 무사히 해결되는 것이다.

나 취업했어 방송국에

 누가 그녀의 학비를 지원해주었을까?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주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런 대가성이 없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런 후원을 받게 되는 것일까? 아마 이러한 후원을 미끼로 해서 다른 음험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도 충분히 해볼 수 있을 법한 일일 것이다. 만약 영화의 키다리 아저씨가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다면 삼류 에로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내용보다 남성의 사랑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 보자. 남성의 사랑이 순수하게 성적 쾌락을 담보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것은 요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여성에게 선물공세를 할 때 어느 정도의 의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질을 전달해 줄수록 말은 적게 하게 된다. 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말은 자연히 많아지게 될 것이다. 만약 남성성을 떠맡기 어려움을 느끼는 남성이라면 물질 공세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는 물질 공세에 대해서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에게 전달되는 후원이 어떤 성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지원이 그녀에게 모욕을 안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호의는 찜찜함을 남기기 때문이다.

방송국에 선물이?

 영미는 라디오에서 어떤 사연을 진행하게 되는데 그 사연의 핵심은 이렇다. 자신이 머무는 집의 컴퓨터에 누군가 계속 이메일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약 메일로 전송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기심에 열어본 메일은 이상했다. 그 사람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변하지 않을 자신의 마음을 구구절절하게 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단서를 얻어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약 메일로 오고 있다는 것은 이메일을 보내는 사람이 더 이상 메일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여성이 쓴 편지 같았다. 가슴 아프게 한 남자를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말하지 못한 자기 마음을 적어놓은 글로 읽혔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의지와 결단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성이었다면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의지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남자라면 사랑할 것이라는 결단이 묻어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마음에는 결단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결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는 그런 이유들에 대한 연결고리들을 보여주고 생각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키다리 아저씨를 찾을 수 있는 단서도 던져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것이 일반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는 스토커도 아니다. 만약 영미를 훔쳐보면서 도와주는 스토커라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데 급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동안 읽었던 메시지는 어떤 형태를 갖춘다. 이 영화에서는 상호성이 배제된다. 이러한 일방성이라면 사랑 이전의 충동 문제로 생각해 보아야 할까? 단순한 충동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도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준호, 방송국 이사장의 동생.

 영미의 키다리 아저씨의 이름은 <준호>였다. 방송국 이사장의 동생인 그는 위중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의사로부터 시한부를 판정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병의 문제로 남성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의 사랑에서 준다는 행위 자체는 여러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그중 하나로 가진 것을 준다는 말이다. 즉, 남성성을 대신 담보할수 있는 것이 <경제적 지원>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변태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을 만족하게 해주는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돈과 섹스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일 것이다. 돈을 잘 벌어다주거나, 만족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후자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주어진 미래도 없었다. 현재 그녀의 필요를 도와주는 것 말고는 그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 것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인데, 그가 성적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태도는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준호는 상실해 가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완할 유일한 방법으로 영미를 도운 것이다. 그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최종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영미를 욕망할 수 없을 때, 그의 남성성도 완전히 상실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준호가 영미에게 소망한 것은 딱 하나다. 그는 하늘에 뜬 별들의 의미에 대해서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별이 되었다는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여기서 확인되지 않는가?     


 그가 예약 메일을 통해 그녀에게 미리 그리움을 전달한 것도 여기서 이해가 될 것이다. 여성의 문체로 글을 썼다는 것이 남성성의 상실 과정을 그린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이벤트로 생각할 수 없다. 그에게는 주어진 미래가 없었기에 그녀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미가 없었다면 준호의 마지막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영미에게 기억됨으로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존한 채 마지막을 맞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주어야만 하는 남성적 사랑의 모습이 준호의 남성성을 지켜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종적인 결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남성성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져있지만 마지막만큼은 <남자>이고 싶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도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로 기억되기를 소망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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