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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Jun 19. 2024

킹스 스피치(1)

왜 말을 더듬게 된 것일까?

영화 킹스 스피치는 실제 영국의 왕 조지 6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더듬에 시달렸었고 그것은 성인이 되기까지 쉽게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말더듬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때는 1939년 전 세계에 연설을 하는 자리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명한 여러 치료사들을 만나서 치료 시도를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포기해 버립니다. 치료 문제가 지나치게 오래되면 지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어치료 쪽에 성과가 있는 라이오넬 박사를 만나게 하는 겁니다. 


 조지 6세. 아니 요크 공작이라고 해야겠네요. 아직은 즉위하기 전이니까요. 요크 공작은 라이오넬 박사를 만나자마자 치료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물론 치료가 빨리되어서 말 더듬을 빨리 멈추고 싶을 겁니다. 누구나 그럴 겁니다. 특히 말더듬과 같은 기능장애는 빨리 회복하고 싶을 것이니까요. 

 


 라이오넬 박사는 공작의 말더듬이 치료될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크 공작이 좀 의욉니다. 말더듬이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요크 공작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공작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해당 증상의 치료를 시도해 왔는데. 고쳐지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실의에 빠졌지만 치료는 시도합니다. 다만 요크 공작은 치료에 있어서 사생활 이야기는 제외하고 치료만을 요구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런 요구를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저도 가끔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가족의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의 분석이 어떻게 되냐고요. 분석은 자기에게 말해주고 치료는 따로 하면 안 되냐는 겁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말하는 것이 곧 치료로 이어지는 겁니다. 따로 분리가 되는 것은 아니죠. 말 더듬 역시 그렇습니다. 사생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치료에 긍정적인 역할을 부여해 줍니다. 특히 치료자와의 전이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사생활 이야기가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정신작용은 특정한 치료시간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작동합니다. 특히 사적인 시간에 더 활성화되어서 작용하죠. 그래서 양성 증상과 음성 증상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상담시간이나 치료 시간에는 이게 좀 덜하다는 거고요. 


  그리고 1963년, 아버지인 조지 5세가 병환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형인 에드워드 8세가 곧 즉위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우울했던 공작은 치료실에 찾아가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 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라이오넬 박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료 외 시간이니 만큼 전문적 이론을 갖다 댈 필요는 없지만 공작의 어린 시절은 충분히 치료에 있어서 유익한 자료가 될 겁니다.

 

  말더듬의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언어치료를 전문적으로 하는 이론에서도 무엇이라고 딱 결정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치료에서는 근육의 움직임도 말더듬에 관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턱근육 마사지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체적인 원인이 관찰되는 말더듬이라면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더듬의 경우, 언어치료에서는 마사지와 같은 것도 적용이 되지만 심리상담도 어느 정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 더듬을 극복하기 위해서 '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말더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 하나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더듬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맞는 말 같습니다. 말을 그만큼 많이 하지 않아서 어색해서 더듬는다는 논리인데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기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쉽고 설득력 있는 답변은 치명적인 오답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혹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식에서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동안 요크 공작이 어떤 치료를 해왔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왕을 치료할 기회를 부여받은 치료자들은 명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그 누구도 요크 공작에게 치료효과를 이끌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치료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명성이 일반 대중에게는 하나의 전이효과로 작용하면서 치료효율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족이나 상류층에서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상쇄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전이가 잘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 문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니고 있는 자기 체면의 문제와도 직결이 됩니다. 심리치료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정신분석을 한다고 해서 제 임상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정신과 의사는 그 임상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습니다. 배운 것이 다르니까 임상을 살펴보는 것도 달라지는 것이죠. 물론 저도 정신과 의사와 입장이 다르니까 찬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료를 추구하는 방식이 각자가 다 다르다는 거죠. 라캉이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은 합쳐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은 그 길이 요원하긴 합니다.


 라이오넬 박사는 치료를 시작하고 싶으면 자기가 '원할 때'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을 정신분석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다면 '낫고 싶을 때'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요크 공작이 치료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그 말은 참 의아합니다. 모든 기능장애 환자들은 자신의 기능이 최대한 빠르게 회복되길 기대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오넬 박사의 '원할 때'라는 말은 도발적입니다. 

 

 정신분석에서 신경증을 바라보는 관점은 자기 방어입니다. 자기 방어가 과도해서 자기 스스로를 공격하는 상태인 겁니다. 병으로 따지면 일종의 자가면역질환 같은 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물론 류머티즘과 같은 증상은 프로이트 시절에 히스테리로 등장해서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정신분석에서도 이런 류의 자가면역질환들에 대해서 검토할 수 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CRPS(복합통증증후군)와 유사하게 해부학적 원인이 관찰되지 않는 질환에는 정신분석이 유효합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런 경우들이 관찰이 됩니다. 특히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의학에서 치료가 어려운 내용들이 정신분석에서 치료가 된다는 이야깁니다. 저도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 좀 확신이 들었습니다. 


  요크 공작은 지금까지 증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해 왔습니다. 치료를 원한다는 것은 그 방어를 멈추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척 기분이 나쁜 말이 되기도 하죠. 정신분석가들이 내담자들의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방어를 멈추라는 메시지가 되기 때문에 불쾌한 것이 됩니다. 흔히 이 부분이 성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불쾌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꼭 성적인 내용이 아닌 것도 들어갑니다. 아마 성적인 내용이라고 하는 편견은 1960년대 미국 정신과 의사들이 히스테리 환자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과거에서 부터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해보면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처음에 분석 받을 때 그런 걸 많이 느꼈었고요. 


 치료저항이 나타나는 것은 증상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에도 발생합니다. 즉, 병의 이차이득을 노리는 것입니다. 요크 공작의 말 더듬은 '말'을 하는 자리에서 빠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게 되면 다른 것보다 권리포기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크 공작은 왕족이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서 국민들의 힘을 북돋아주어야 합니다. 그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입니다. 


  이차이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런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병의 이차이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치료에 있어서 꽤 저항의 요소를 많이 만들어냅니다. 어떤 증상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현실에 특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려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병을 활용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심리적 문제가 심각해서 학교에서 조퇴를 하는데 이 횟수가 너무 잦다는 겁니다. 심각한 경우에는 선생님이 조퇴를 금지해도 막무가내로 집에 가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증상에 머물면서 현실의 특혜만을 노리는 겁니다. 당연하게도 치료저항으로도 작용합니다. 병이 현실의 이익을 가져오게 되면 추가적인 문제들이 따라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병이 그것을 해결해주길 막연하게 기다리기도 하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기능상의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을 때, 아주 간단하게 납득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선천적인 것으로 바라보면 됩니다. 특히 요크공작은 5살부터 말을 더듬었으니 선천적으로 진단한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 받아들일 겁니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것이라면 치료는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능발달이 그만큼밖에 안 되는 것이 정상이니까요.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5살 정도 되어서 유년 신경증이 발병이 되었다거나 해도 후천적으로 봅니다. 이것은 뇌의 기능과 정신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치료를 신체는 신체의 방식에 따라야 하고 정신은 정신의 방식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체질환을 치료할 때, 원인이 되는 환부를 제거합니다. 그런데 정신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합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신경증 문제를 유전으로도 검토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유전문제를 따로 검토하진 않습니다. 뇌에 어떤 특정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정신역동이 돌아가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와 같은 방식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약을 쓰면 신체에서 느끼는 고통을 조절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도 고통스러워서 약을 쓰면 그 고통이 줄여질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약물을 통해서 어느정도 행동은 조절한다고 해도 치료와는 별개 문제가 되기도 하죠.


  다시 영화로 돌아가봅시다. 요크 공작은 라이오넬 박사와 내기를 합니다. 라이오넬 박사는 말하는 어떤 방식을 제안하는데 그대로 말을 한다면 더듬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크 공작은 그 말대로 헤드폰을 끼고 대본을 읽어봅니다. 그런데 더듬지 않고 유창하게 대본을 읽어내는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말을 더듬지 않았다는 것을 요크 공작은 부정합니다. 증상이 어떻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니까 자기도 얼떨떨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크 공작의 말더듬이 정신작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역시 정신작용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리를 통해서 발생하는 정신작용이 말더듬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증상과 진단명을 1:1의 대응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게 증상의 형성은 논리적 정합성이 관계되어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 논리의 정합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치료에 유효하다고 보고 있고요. 흔히 알려진 말로는 증상의 논리라는 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요크 공작은 자신이 유창하게 말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진 않아도 치료를 진행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조금 더 높은 이해도를 지닌 사람과 치료를 진행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변합니다. 요크 공작은 버티로 라이오넬 박사는 로그로 더 친밀하게 부르는 겁니다.


 버티는 로그에게 말하는 '기능'만을 회복시켜 주길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로그는 "기술은 단지 훈련이면 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이란 기존 버티가 해오던 치료방식입니다.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치료의 핵심으로 접근은 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심리문제가 나타날 때, 주 호소 문제는 기능의 회복입니다. 요즘은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하면 adhd를 생각해서 곧장 약물을 복용하고 집중력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adhd로 진단되지 않으면 스스로 좀 당황스러워하죠.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다고 믿는데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니까요.그래서 "어떻게 나아야 하는데!"라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이때 동시에 강해지는 것은 자가치료의지입니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죠.


  정신적 문제를 진단하는 데 있어서 드러나는 현상의 문제만을 살펴보고 진단한다면 표현되는 양상은 무한대로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을 발생시키는 구조는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가 꿈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각을 가졌습니다. 꿈의 표현양상은 수천수만 가지가 되지만 그 꿈을 형성하는 작동기 전은 정해져 있는 겁니다. 신경증이 발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무척 다양해도 그 증상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정신작용은 몇 가지 안 된다는 겁니다. 


  버티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리고 자신의 증상에서 중요한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버지인 조지 5세가 사망한 것입니다. 버티는 깊은 슬픔에 잠겨 로그의 사무실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 내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버티는 자신의 사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치료실의 로그에게 자신의 사적 감정을 터놓았다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참지 않고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 찾을 수 있는 개인사적 내용은 무척 소중한 자룝니다.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하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단서를 잡는다면 그의 정신장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검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제가 곧잘 쓰는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신경증 문제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흔히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병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말일겁니다. 그것으로부터는 '구조'가 형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구조를 통해서 현실을 경험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성격형성이 되면 죽어도 안 변한다는 게 이 '구조'의 문제이지 심리에서 나오는 성격이 아닙니다.

 

  버티는 왼손잡이였습니다. 요즘은 왼손잡이라면 '그렇구나'라고 넘어가지만 과거에는 왼손잡이들을 좀 차별하기도 했었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억지로 바꾸려고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아이에게 다소 억압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교육은 아이의 병리적 초자아 형성에 기여합니다.

 초자아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버집니다. 아버지의 이미지를 내면에 받아들이면서 형성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초자아를 통해서 질서를 지키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병리적 초자아라는 말에 조금 겁이 날 수도 있을 겁니다. 병리적 초자아의 내용은 건강한 초자아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리적 초자아에는 '너는 그것도 못해'라는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병리적 초자아는 개인을 실패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내면에서 우리의 행동을 과도하게 비판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학 때문에 저절로 위축이 되죠. 


 게다가 왕족이지만 어린 시절 유모에 의해서 학대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대 사실을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그러죠. 그런 일련의 사건들로 형성된 병리적 초자아로 인해 자아가 계속 찌그러져왔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그 병리적 초자아는 자신의 말할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마치 어린 시절의 버티를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학대하고 괴롭혔던 유모처럼 기능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초자아 문제를 좀 더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슬픔에 빠져있는 버티가 로그의 자녀들의 퍼즐에 한 조각을 더 붙이려고 하자 로그가 제지합니다. 대신 노래를 하면서 말을 한다면 하나를 허락하겠다고 합니다. 버티는 노래를 하는데, 더듬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 더듬지 않았을까요? 초자아의 검열이 말을 더듬게 하지만 그 검열을 어떻게 뚫어낼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는 강박증에서 지나친 금욕을 이야기했었습니다. 버티는 남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가진 금수저지만 정작 그는 즐겁게 살수가 없었던 겁니다. 신경증적인 삶이 그렇습니다. 현실에서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환상마저도 제대로 즐기질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과 다르게 지나치게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실제 임상에서도 이런 상황은 꽤 자주 발견됩니다. 정신분석가를 찾게 되는 사람들이 잘 보면 증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서 찾기보다는 즐겁지 않아서 찾게 되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는 것은 어느정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게 병으로 현실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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